태평양전쟁과 기독교의 ‘종교보국(宗敎報國)’
태평양전쟁은 2차 세계대전의 일부이다. 1937년 중화민국과 일본제국 사이에 벌어진 중일전쟁은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순식간에 확대되었다. 영국과 미국이 일본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고 대일본 전쟁을 시작했다. 일제는 이 전쟁을 서방 세계로부터 아시아가 독립하기 위한 전쟁이라는 의미로 대동아전쟁이라고 불렀다. 이후 약 6개월 정도는 일본이 우세한 상황이 이어졌다. 일제는 홍콩, 괌, 마닐라 등을 차례로 점령하며 그 세력을 넓혀나갔지만 전황은 원하던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연합군이 재정비 후 공세로 전환하면서 교착상태가 이어졌다. 일제는 1945년 8월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소련이 만주를 공격하며 참전하자 항복을 선언하였다. 일제를 지원하던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은 이미 연합군에 항복한 상태였기에 태평양전쟁의 종료는 2차 세계대전의 종료이기도 했다.
중일전쟁부터 태평양전쟁의 시기 한국인들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우리가 현재 아픈 역사로 기억하는 종군위안부와 강제징용, 강제징병 등이 모두 이 시기의 일이다. 일제는 중일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1938년 ‘국가총동원법’, ‘육군 특별 지원병령’을 시행했고, 1943년에는 ‘육군 특별 지원병 임시 채용 규칙’을 공포하고 어린 학생들까지 ‘학도 지원병’이라는 이름으로 전쟁에 투입했다.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였다. 한국교회의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한국교회는 이 어려운 시기 일제의 침략전쟁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장로회를 중심으로 이 과정을 살펴보자면 역시 출발은 신사참배의 결의였다. 1938년 제27회 장로회총회에서 한국 장로교회는 ‘신사는 종교가 아니고 기독교의 교리에 위배되지 않는 애국적인 국가의식’이라며 신사참배를 솔선수범하여 수행하고 국민정신총동원에 참여하기로 결의하였다. 이후 장로회의 모든 공식 행사에 신사참배가 포함되었다. 그리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신앙인들을 교회가 오히려 치리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주기철 목사가 1939년 파면당하고 그가 시무하던 평양 산정현교회가 폐쇄된 것이 가장 유명한 사례이다. 신사참배 거부는 한국교회 신앙의 마지막 보루였고 이것이 무너지자 교회의 친일행각은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질주하기 시작했다.
1939년 제28회 총회에서 장로회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을 결성했다. 이사장에 윤하영 목사가, 총간사에 정인과 목사가 임명되었다. 이 연맹의 목적은 이른바 ‘종교보국(宗敎報國)’에 있었다. 종교보국이란 일제가 추진한 총후보국(銃後報國) 정책의 한 갈래로 전투가 일어나지 않는 후방에서도 물자동원에 교회가 앞장선다는 뜻이었다. 이어 총회는 각 노회와 교회에 ‘애국반’을 조직할 것을 결의했다. 전국적으로 조직된 애국반은 다양한 전쟁지원 활동을 벌이는 말단 조직이었다.
1940년의 제29회 총회에서 1937년부터 1939년까지의 전쟁 협력 통계가 보고되었다. 각 활동들은 매년 가파르게 증가하였는데 총계로 따지면 전승축하회 594회, 무운장구기도회 9,053회, 국방헌금 1,580,424원, 휼병금(恤兵金) 172,646원, 유기(鍮器) 헌납 308점, 시국강연 1,357회, 위문 181회, 위문대 1,580개, 애국반 731개, 애국반원 5,764명이 보고되었다. 보고자인 정인과 목사는 이상의 통계를 보고하며 장로회가 다른 종교나 교파에 비해 월등한 성과를 보였다면서 “이만하면 기쁨”을 느낀다고 말했다. 몹시 뿌듯했던 모양이다.
1940년 12월에는 전선(全鮮)장로회신도대회가 개최되었다.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을 해체하고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을 결성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교회의 사명은 정신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결과를 만드는 것이 되었다. 1941년 4월에는 전선(全鮮)여신도대회가 열려 여성인력 동원을 목적으로 하는 국민총력연맹 여자부가 결성되었다. 이 단체들 역시 일제의 전쟁 수행을 도왔다.
1942년 2월 일본 육해군에 비행기 한 대, 기관총 7대의 비용을 헌납하면서 전쟁 무기 공급이 시작되었다. 9월에는 해군에 함상전투기, 11월에는 육군기를 헌납하였는데 그 이름이 ‘조선장로호’였다. 일상에서 사용하는 금속 유기는 물로 교회 종이 공출되었고 1942년까지 1,540개의 교회 종이 공출되었다. 그럼에도 총회는 계속해서 아직 종을 가지고 있는 교회들에게 빨리 종을 바칠 것을 독촉하였다. 급기야 일제의 정책에 따라 교회들이 통폐합되기 시작했다. 교회들이 처분되었고 교회 매각금의 일부는 다시 일제에 국방헌금 명목으로 헌납되었다.
장로교회는 무기공급의 시작을 시작하면서 동시에 당시 철도노선에 따른 5개조로 연사를 파견하여 ‘지방시국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전쟁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서였다. 1942년 5월 11일에 서울 승동교회에서 ‘징병제 감사 기독교신도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는 일제 당국에 징병에 대한 감사문을 전달하고 “이 감격에 울지 않을 수 있을까. … 황군(皇軍) 용사를 내 아들, 내 손자, 내 동생을 갖는 아버지도 조부도 형도 누나도 울어라. 울 수 있는 데까지 울어라. 울음을 그치거든 어떻게 이 감격에 답할까를 조용히 생각하라”는 성명을 채택했다.
간혹 친일 과거사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당시 친일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는가?’, ‘친일하지 않고 당시 한반도에 살 수 없었다’ 등의 이야기를 듣고는 한다. 하지만 교회의 친일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하기 어렵다. 기본적으로 천황제 이데올로기 자체가 천황을 신으로 숭배하는 종교적 특성을 가지고 있었고, 신사참배는 우상숭배에 해당했다. 그리고 ‘종교보국’ 활동은 살아남기 위해 할 수 없이 했다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적극적이었고 능동적이었다. 한국장로교회는 신사참배와 관련해서는 죄책고백을 했지만 여전히 많은 교단들이 전쟁협력에 대해서는 입을 닫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