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교회주의 그룹의 '성서조선' 그룹의 필화 사건
한국교회사에는 널리 알려지진 않았으나 무교회주의 그룹이 있었다. 이들에 대한 신학적 평가는 다양한데 본고에서는 김교신과 함석헌 등의 지식인이 중심이 되었던 “성서조선 “사건을 소개하려 한다. 「성서조선」은 1927년 7월 창간된 기독교 잡지로 창간 동인은 김교신, 함석헌을 비롯하여 정상훈, 양인성, 류석동, 송두용 6인이었다. 이들은 조선인 평신도의 입장에서 성서를 공부하면서 깨달은 바를 잡지로 편찬하였다. 그러다 김교신이 주필을 맡으면서 점차 민족적 성격이 강화되었다.
김교신은 손기정의 마라톤 코치로도 알려진 인물이다. 김교신은 손기정의 양정고등학교 재학 시절 그의 선생이자 코치로 연을 맺었다. 양정고에서 김교신은 일본어로만 수업을 하게 한 일제의 방침을 거부하고 한국말로 한국 위인의 이야기를 학생에게 들려주며 식민치하에 절망하고 있는 청년을 깨웠다. 손기정의 올림픽 우승은 그런 김교신의 민족혼 교육이 낳은 한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도쿄에서 열린 베를린 올림픽 예선에서 김교신은 손기정 앞에서 차에 탄 채 레이스를 코칭했다. 손기정이 1위로 치고 나온 순간부터 김교신은 눈물을 흘리며 제자에게 힘을 불어넣었다. 훗날 손기정은 “다른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오직 김교신 선생님의 눈물만 보고 뛰어 우승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교신이 「성서조선」에 동인으로 참여하고 주필까지 맡았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김교신이 「성서조선」에 거는 기대는 다음과 같았다.
“아무런대도 너는 조선인이구나. 「성서조선」아, 너는 소위 기독자보다도 조선혼을 가진 조선 사람에게 가라, 시골로 가라, 산촌으로 가라, 거기에 나무꾼 한 사람을 위로함으로 너의 사명을 삼으라.”
그는 조선인을 위로하고 희망을 전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성서라고 믿었고 성서와 조선은 하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교신이 기독교에서 민족을 살릴 희망을 발견한 것은 일본 유학시절이었다. 김교신은 도쿄에서 유학하던 중 일본 무교회주의 지도자인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연구회에 나가며 7년간 성서를 공부했다. 우치무라는 “두 개의 J(Japan, Jesus)”를 주창하면서 한국인 제자들에게는 너희 나라의 기독교를 만들라고 독려했다. 이 한국인 제자들이 곧 「성서조선」의 창간인들이다. 이들은 일본에서 이미 ‘조선성서연구회’를 조직하고 한국인의 심령에 뿌리 내릴 기독교를 추구하며 성서연구에 매진하다 귀국 후 잡지를 창간한 것이었다.
조선총독부가 일본적 기독교의 확립이나 종교보국을 강요하며 기독교를 탄압하던 시기「성서조선」이 무사할 수는 없었다. 결국 1942년 3월 발행된 ?성서조선? 제158호에 김교신이 쓴 권두언 “조와(弔蛙, 죽은 개구리를 애도함)”가 문제가 되었다. 이 글은「성서조선」의 정신을 한 페이지에 압축한 것이었다. 그 후반부를 쉽게 풀어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늦은 가을도 지나서 연못 위에 얇은 얼음이 붙기 시작하자 개구리들의 움직임이 하루하루 느려지다가 나중에 두꺼운 얼음이 시야를 가린 후로는 기도와 찬송의 소리가 저들의 귀에 닿는지 안 닿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이렇게 만나지 못한 지가 무릇 수개월여.
봄비 쏟아지던 날 새벽, 이 바위틈의 두꺼운 얼음도 드디어 풀리는 날이 왔다. 오래간만에 친구 개구리들의 안부를 살피고자 연못 속을 구부려서 찾았더니 오호라, 개구리의 시체 두세 마리 연못의 가장자리에 떠다니고 있지 않은가!
짐작컨대 지난 겨울의 비상한 혹한에 작은 연못의 밑바닥까지 얼어서 이 참사가 생긴 모양이다. 예년에는 얼지 않았던 데까지 얼어붙은 까닭인 듯, 동사한 개구리 시체를 모아 매장하여 주고 보니 연못 밑바닥에 아직 두어 마리 기어다닌다. 아, 전멸은 면했나보다!”
태평양전쟁으로 민족의 시련이 더할 나위 없던 추운 나날 속에서도 언젠가는 봄이 올 것이며 조선의 민족혼은 끝내 살아남고 말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아무리 은유적 표현이었다고 해도 이미 이들을 주시하고 있던 일제 당국이 이를 놓칠 리 없었다. 「성서조선」주요 관계자들이 모두 사상범으로 검거되었고 200여 명의 독자들도 모두 붙잡혀 취조를 받았다. 사건의 담당 검사는「성서조선」의 관계자들을 “가장 악질적인 부류”라고 평했다. “종교의 허울을 쓰고 조선 민족의 정신을 깊이 심어서 백년 후에라도, 아니 5백년 후에라도 독립이 될 수 있게 할 터전을 마련해 두려는 고약한 놈들”이라는 것이다. 후에 김교신은 “그때 일본 검사가 보긴 바로 보았거든”이라 말했다.
결국 이듬해「성서조선」은 폐간되었고 김교신은 흥남의 비료공장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하다 해방을 보지 못한 채 1945년 4월 25일 발진티푸스로 세상을 떠났다. 민족의 수난 역사 입장에서 보면 한국의 주요 교단들이 차례로 일제의 압박에 굴복하고 친일의 길을 걸을 때 교계의 변방에 위치하여 주목받지 못했던 소수의 신앙운동가들이 기독교를 통해 민족을 살리기 위해 분투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친일과 일제부역에 열중하면서도 정통과 보수를 자처하는 대형 교단들을 부끄럽게 만든다. 원로 교회사학자 민경배가 일제 말 한국교회를 일컬어 “타도 타버리지 않는 숲”이라 말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런 변방의 저항과 시련이었다. 오늘날 김교신은 한국교회의 정신이 ‘전멸은 면했던’ 증거로 기억되고 있다. 그의 예언이 자신을 통해 성취된 셈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런 그의 정신을 기려 한일강제병합 100년이 되던 2010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