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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넓게 하셨으니



 신학자 몰트만은 일찍이 ‘희망의 신학’을 말한 바 있었습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수렁에 빠져 있던 세계를 향해 그리스도 안에 희망이 있음을 역설하면서 희망의 신학을 말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시 독일군으로 참전했던 그는 영국군에게 포로가 되어 스코틀랜드의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는데 이 수용소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극적이고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몰트만은 ‘스코틀랜드의 포로수용소에서 수렁에 빠져 있던 나의 영혼에 예수님이 찾아주셨다. 그는 잃어버린 나를 찾아주시기 위해 내 곁에 오셨고 내 희망이 되셨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인류 문제의 해법도 예수 안에 있음을 말하면서 ‘예수는 희망이시다, 신앙은 희망이다’라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또 한 사람 희망의 신앙인 이삭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아버지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로 아버지 아브라함 사후 뒤를 이어 족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부족의 생사를 책임진 자리에 섰습니다만 그의 행보는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창 26:1)라고 했습니다. 가나안의 흉년은 무서웠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실망하지 않습니다.

 1. 희망의 근원 - 하나님의 언약
 가나안에 흉년이 찾아오자 유목민이었던 이삭의 가족은 풀과 물이 있는 곳을 찾아 생존을 위한 이동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지배하던 그랄 땅이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지중해 해변 지역을 장악하고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던 민족이었습니다. 이삭은 블레셋의 왕 아비멜렉을 찾아가서 그에게 거주를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호랑이 굴로 걸어 들어간 것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시련과 폭풍이 눈앞에 보였지만 이삭은 불가피하게 아비멜렉을 찾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태연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이삭과 함께 하실 것과 땅과 자손을 주시며 천하 만민에게 복의 씨앗이 될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2-4절) 그는 이 언약의 말씀을 믿고 담대하고 평화로울 수 있었습니다. 이삭은 막연한 낙관주의자가 아닙니다. 희망은 반드시 존재하지만 희망의 근거는 분명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희망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근거해야 합니다.
 존 칼빈은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을 넘어서기를 재촉한다’고 하여 어떤 상황 속에서도 세상에 얽매이지 않는 희망의 사람들이 될 것을 가르쳤습니다. 현대 과학은 매우 명석하게 현실을 진단하지만 희망을 제시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희망을 말씀하시고 약속하십니다. 우리 개인의 삶에 엄청난, 이해 못 할 시련들이 다가와도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심지어 신앙인은 ‘죽어도 다시 사는 사람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겐 언제나 희망이 존재하고 그 희망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근거합니다. 이삭이 흉년과 피난과 이방인 왕에게 가족을 의탁하는 어려움에 처해도 당황하거나 허둥대지 않는 것은 그들의 미래를 보장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 때문입니다.

 2. 새로움에 도전하다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담대한 이삭은 이 낯선 곳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12절). 원래 이삭은 유목민이었습니다. 아브라함 때로부터 그들을 소개할 때 ‘양과 소가 있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농사하는 것이나 목축하는 것이나 큰 차이가 없을 것 같지만 문명의 발전 과정에서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인류 문명은 수렵시대에서 유목시대로 발전하고 유목에서 농경사회로 발전했습니다. 그리고 근대에 이르러 산업사회로 발전해 왔습니다. 때문에 유목민 문화와 농경사회 문화는 매우 큰 차이가 있었고 유목민이 농사에 도전하는 것은 매우 큰 모험이었습니다. 이삭은 이 새로움에 도전하여 성공했습니다.
 그 해에 백배나 얻었다는 것은 매우 만족할 만한 최대의 성과를 거두었음을 의미합니다.(12, 13절) 농사라는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은 이삭이 믿음으로 한 것이지만 성공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므로 가능했고, 하나님의 복 주심은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하신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신 것을 의미합니다. 15절 이하에서는 이런 성공을 거둔 이삭을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하여 그들의 우물을 빼앗고 메워버리는 일이 반복됩니다. 이런 만행은 15절, 18절, 20절, 21절에서 네 차례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목축을 하거나 농사를 짓는 일에 물은 너무나 중요한 요소입니다. 우물은 부족 공동체 전체의 생사를 가름하는 생존의 조건입니다. 그런데 그 물을 얻기 위해 힘겹게 우물을 개발하면 따라다니면서 메꾸는 만행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22절)고 했습니다. 아무리 그들이 추격하면서 훼방하고 메꾸는 일을 반복해도 하나님은 오히려 그들을 더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면서 또다시 우물을 얻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축복하시면 사람의 훼방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만약 이삭이 농경문화 수용을 거부하고 과거의 답습만 고집했다면 그에게 미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 새로운 도전에 숱한 어려움이 많았지만 하나님께서 내 편이 되심을 믿고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면 사람의 훼방은 문제 될 것 없다는 믿음으로 대응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르호봇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3. 평화를 누리다
 브엘세바에 정착하여 번영을 누리던 이삭에게 블레셋 왕 아비멜렉 일행이 평화협정을 맺자고 찾아왔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다.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라고 고백합니다. 아무리 훼방해도 오히려 더 번성하고 복을 받는 그를 보고 아비멜렉 왕은 드디어 새로운 발견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화친은 아비멜렉의 진정한 반성과 회개가 있었기 때문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과거사를 문제 삼아 협상 조건을 제시하지 않고 흔쾌하게 수용하여 협정을 채결하고 평화를 만들어냅니다. 이삭의 모습에서 보는 것은 온유함, 비폭력, 관용과 포용 등의 품격 높은 삶의 자세입니다. 이런 그의 인격을 가능케 만든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신뢰하는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이 신앙으로 사는 사람의 참된 영향력이며 그 지경을 넓히는 진정한 르호봇의 복을 받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오늘도 우리 주변이 변화되고 새로워지는 것은 우리의 힘이나 거친 태도나 독설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온유하심, 관용하심, 그의 거룩하신 희생이 온 세상을 구원하는 능력이 됩니다. 이런 품격 있는 모습으로 우리 주변의 아비멜렉들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은혜가 성도들에게 임하시길 기도합니다. 그때 우리 지경을 넓히시는 르호봇의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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