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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희망을 향하여 가야합니다
(고후 4:16-18)



 본문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두 번째 편지입니다. 이 편지에서 바울은 그의 중단될 수 없는 희망에 대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이 세상을 넘어서는 영원한 희망까지 제시하며 우리가 어떻게 영원한 희망의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가르치면서 희망의 도전 의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1. 바른 가치관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바울의 가치관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겉사람보다 속사람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지금의 환난보다 장차 받을 영광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민족주의자였고 학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기 민족에 대한 열렬한 사랑을 고백하는 민족주의자로서의 가치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상위의 가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얻어야 한다는 복음 전도자의 가치관과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영혼 구원이 육신의 행복보다 중요하고 이 세상의 나라보다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따라 살아갑니다.
 바울은 민족주의자로서의 가치를 버리고 전도자로서의 삶을 선택합니다. 한 개인이 자기 삶 전체를 바칠만한 바른 가치관을 갖지 못하면 그 인생은 허수아비 같은 것입니다. 제가 후배들이나 신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강의할 때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종교기술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오래 교회생활을 하다보면 교회 일에 능숙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능숙함이 기계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능숙함 속에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주님을 위해서라면 내 생명도 아깝게 여기지 않는 충성심이 있어야 하나님이 받으시는 헌신이 됩니다.
 가치관이나 정신은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방향의 중요성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예컨대 부산을 가려하는 사람은 우선 부산으로 가는 차를 타야합니다. 기차든, 비행기든 버스든 일단 부산행을 타야 합니다. 그 안에서 어떤 일을 겪게 되더라도 그 방향으로 가야만 목적지가 다가오게 됩니다. 이와 같이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 그 사람의 가치관입니다. 바울은 ‘겉사람보다 속사람이 더 중요하다, 세상의 환난보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이 더 중요하다, 보이는 이 세상의 것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혹독한 박해를 당하고 모진 시련 앞에 육신이 무너져 내려도 결코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복음과 신앙에 기초한 올바른 가치관과 정신을 지닌 성도들이 되어야 가고자 하는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희망의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2. 능력의 원천은
 바울은 어떤 방해와 저항 가운데서도 중단 없이 도전하고 어떤 경우에도 무너지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삶을 지켜나갈 것이라고 고백합니다.(8-9절) 낙심하지도 않고, 버려진 자가 되지도 않고, 망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를 이렇게 초인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어주는 능력의 원천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7절). 보배를 질그릇에 품으므로 심히 큰 하나님의 능력이 그 위에 머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자주 인간을 질그릇에 비유했습니다. 무가치하고 볼품없고 잘 상하고 깨어지는 연약한 질그릇 같은 존재가 인간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질그릇 같은 인간의 가치가 완전히 바뀌는 순간이 있습니다. 질그릇에 보배를 담는 것 같이 연약하고 죄 많은 인간이 보배로우신 주님을 영접하고 모실 때입니다. 그때부터 질그릇 같은 나 때문에 귀한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주님 때문에 내가 소중하고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인이 되고, 새 피조물이 되고,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이 머무는 삶을 살게 됩니다.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7절). 우리는 모든 것을 인간 능력에만 의지하려 합니다. 자기 지식, 경험, 돈, 세상의 권위, 인간의 기술과 과학 등이 주는 힘으로 세상을 살려고 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일들도 이 세속적인 능력으로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번번히 실패하고 무너지고 좌절하게 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그래도 질그릇 같은 우리가 다 주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하나님 자녀의 권세가 있습니다. 이미 우리 안에는 보배가 있습니다. 세상이 가진 것을 가지지 못한 것 때문에 소외감 느끼고 열등감 가지고 스스로 인생의 회의를 느끼지 마시지 바랍니다. 우리 안에 주님 계십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머무십니다. 우리는 보배를 품은 질그릇들입니다. 심히 큰 하나님의 능력이 이미 우리 안에 있습니다.

 3. 거룩한 희생의 신앙
 진정으로 희망의 역사를 만드는 사람은 희생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죽는 자가 되면 예수의 생명이 그 안에 임하게 됩니다.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10절), 또는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11절)이라는 표현은 주님을 위하여 날마다 죽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은 실재적으로 자기 육신을 죽음에 넘겨주듯 생사를 초월한 헌신을 의미합니다.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고난을 회피하지 않고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잔을 기꺼이 마시면서 묵묵히 주님을 따르는 행위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마땅한 권리의 포기로 표현했습니다.
 간디는 7가지 사회악을 말한 바 있습니다. 1. 원칙 없는 정치(Politics without Principle) 2. 노동 없는 부(Wealth without Work) 3. 양심 없는 향락(Pleasure without Conscience) 4. 인격 없는 지식(Knowledge without Character) 5. 도덕 없는 상업(Commerce without Morality) 6. 인간성 없는 과학(Science without Humanity) 7. 희생 없는 종교(Religion without Sacrifice)라고 했는데 그 가운데 절정이 ‘희생 없는 종교’라고 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일 가운데 희생 없는 권리주장입니다. 희생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면 참 신앙의 즐거움을 모르게 됩니다. 본문은 그 거룩한 즐거움을 두 가지로 설명하는데 첫째는 나를 죽음에 넘기듯 희생했더니 예수의 부활의 생명력이 내 삶에 넘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11절) 둘째는 나는 죽음에 넘겨지는 것 같은 십자가의 삶을 살았더니 이런 희생 때문에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고 생명 얻는 구원의 축복이 많은 사람에게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희생하는 헌신자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제는 우리도 희망의 새 출발을 해야 할 때입니다. 이를 위해 신앙의 근본정신을 새롭게 정비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이 감당 못할 심히 큰 하나님의 능력을 이미 우리에게 주셨음을 믿고 십자가 지신 주님을 본받아 희생하는 삶을 실천합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 시대에 새로운 희망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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