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불탄 포도넝쿨처럼 논두렁에 버려진 타다남은 부지깽이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이 쓸모없고 무익한 종 앞에 상을 차려주시고 머리에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내 그릇에 비해 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과분합니다. 나는 천한 질그릇에 불과한데 하나님은 거기에 보물을 담아 주셨습니다. 오늘 나의 나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요, 내 스승과 선배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 홍순복, 세 딸 미리, 미영, 미경이의 사랑 때문이요 그 누구보다 나를 위해 항상 기도해 주시고 격려해 주신 서울교회 성도들 덕분입니다.”
이종윤 목사는 항상 자신을 불탄 포도넝쿨, 타다 남은 부지깽이에 비유했다.
철저한 말씀 중심의 설교자요, 하나님 중심의 목회자요, 열정적인 복음주의자이자, 개혁주의 신학자인 이종윤 목사는 신행일치의 삶을 좇아 평생을 쉼없이 달려오며 한국교계는 물론, 전세계 복음주의권이 주목하는 많은 족적을 남겼다.
이종윤 목사는 1963년 연세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대, 영국 세인트앤드류스 대학, 독일 튀빙겐 대학 등에서 수학하며 정확무오한 하나님 말씀에 대한 절대 신앙을 바탕으로 신학적 체계를 수립하며 아시아 복음화에 대한 비전을 품고 1976년 귀국하여 아세아연합신학대 교수와 전주대총장 등을 역임하고, 장신대와 연세대 등 여러 학교에서 제자들을 양성했다.
또 세계신약학회(SNTS)회원, 아세아신학연맹(ATA)이사 및 신학교인준위원, 세계복음주의협의회, 교회갱신위원장으로, 한국 복음주의신학회와 한국장로교신학회, 군선교신학회 등을 조직하며 한국 교회를 이끌었다. 목사 안수 이후 35년 동안에 140편이 넘는 공식 논문과 70여 권의 책을 썼고, 수천 회에 이르는 설교와 강연, 저술활동으로 복음주의 신학 발전에 적잖이 기여를 한 목회자이자 신학자이다. 기라성 같은 신학자들의 모임인 세계신약학회의 한국인 회원은 지금까지 이종윤 목사를 포함한 단 두명뿐이었다.
1991년 10월 서울교회를 창립, 시무하면서는 ‘다른 교회를 섬기는 교회’의 모델을 정립하고, 한국교회갱신연구원을 설립하여 해마다 킴치신학세미나와 목회자신학세미나를 진행하면서 국내외 수많은 목회자와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영적인 도전을 주었다. 그런가 하면 전세계복음주의권의 대표적 선교운동인 로잔운동에 뛰어들어 한국로잔위원회와 아시아로잔위원회 의장을 역임하였고, 로잔 국제지도자대회와 에든버러 세계선교사대회100주년 기념 한국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렀다. 이처럼 이종윤 목사는 교단과 교파를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는 몇 안 되는 교계 인물이었다. 2004년에는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의 새번역을 위해 한기총과 NCCK를 동시에 대표하는 위원장을 맡아 100년 만에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의 새번역을 주도했고, 세계유일의 군선교 신학회를 조직하고 초대회장 역임, 군선교연합회의 비전2020운동 위원장으로 군복음화를 이끌었다. 뿐만 아니라 한기총교회발전위원장과 신학위원장을 맡아 순결서약식 운동, 탈북난민보호 UN청원 운동, 기독교 교도소 설립, 목사복 제정, 한기총공동신앙선언문 작성 등을 통해 한기총의 정체성 확립과 발전에 기여했다.
그뿐인가 위대한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 탄생 5백주년 기념행사의 대표회장, 26개 장로교단이 연합과 일치를 외친 ‘장로교의 날’ 제정을 제안하고 행사 준비위원장을 맡았다. 한국의 장로교회들을 대표하는 한국장로교총연합회 대표회장으로 섬긴 그는 교계로부터 ‘이 시대 또 하나의 칼빈’으로까지 불리었다. 이외에도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그의 목회 여정은 많은 열매를 맺었다. 돌이켜 보면 이 모든 사역들은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영적 리더십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들이었다.
이종윤 목사는 1940년 8월 23일 충남 천안에서 부친 이규남(李圭南)씨와 모친 박귀순(朴貴順)씨 슬하의 6남 4녀 가운데 여섯째로 태어났다. 그는 열한 살이 되던 1951년 1월 첫째 주일에 혼자서 교회를 찾아갔다. 이 날은 이종윤 목사 생애의 기념비적인 날로 실로 그가 새 인생을 출발하는 날이기도 했다. 학창시절 이종윤 목사는 달리기를 잘해서 선수 생활까지 했었지만 목사의 소명을 받은 후에는 그렇게 좋아하던 운동도 더 이상 하지 않았고 청소년 시절부터 청교도적 삶을 살기 위해 철저히 힘써왔다.
1967년 5월 23일 이종윤 목사는 김창인 목사의 주례로 당시 충현교회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하고 있는 홍순복 사모와 결혼하여 슬하에 세 딸 미리, 미영, 미경을 두었다. 홍순복 사모는 1938년 6월 18일 평안북도 선천군 선천면에서 출생하며 서울에서 수도여자중·고등학교와 서울대 사범대학 생물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재원이었다.
1976년 11월 28일 이종윤 목사는 미국 필라델피아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와 아세아연합신학연구원 교수가 되어 후학을 양성했다. 아세아연합신학원은 아시아 복음화라는 교육 이념을 가지고 창설된 신학교이다. 그가 부임한 아세아연합신학원에는 당시에 학생이 4명에 불과했고 교수는 5명이었다. 그러나 이종윤 목사는 “오늘부터 26억 아시아인 앞에서 강의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담력을 주소서.” 라고 기도했다.
성도들을 뒤로 하고 떠나는 일은 언제나 어려웠다.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에서 공부하며 이민자들을 위해 개척한 필라델피아 제일장로교회가 이제 겨우 젖을 뗀 상태였고, 목자가 떠나려고 하니 교인들이 우왕좌왕 난리가 났다. 이것은 후에 할렐루야교회에서 충현교회로 떠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는 예수님이 주인이시고 다스리시기에 이종윤 목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과감히 발길을 옮겼다.
1981년 새문안교회는 강신명 목사가 은퇴하면서 이종윤 목사를 청빙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안일함보다는 하나님의 비전을 추구하며 아세아연합신학교를 위해 할렐루야교회를 창립했다. 할렐루야교회는 1980년 11월 신동아그룹 회장이었던 최순영 장로 가족과 함께 자그마한 교회 건물에서 설립예배를 드리며 가족 교회로 시작한 교회였다. 최순영 장로는 이종윤 목사가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 교수로 재직할 때 실업인 선교회 예배에 설교하러 갔을 때 알게 된 사람으로 그때부터 신앙의 동지가 되었다. 그리고 충현교회 2대 목사로 가기까지 7년 6개월간 할렐루야교회를 목회하는 동안 2,500명 이상 출석하는 교회로 급성장시켰다. 이후 충현교회 2대 목사로 부름을 받으며 우여곡절 끝에 1988년 4월 충현교회에서 위임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충현교회 당회장이 된 이종윤 목사는 성도들을 말씀과 기도로 무장시키며 뜨거운 영적 각성 운동을 일으켰다. 당시 충현교회는 역삼동에 성전 부지를 매입하고 모든 건축공사가 끝나 입당예배도 다 끝난 상태이었으나 상당한 부채가 남아있어 헌당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이종윤 목사는 부임 후에 하나님 앞에 내 앞의 홍해를 건너게 해 달라는 기도를 간절히 드리다가 하나님으로부터 ‘홍해작전’을 명령받았고 첫번째 홍해작전을 갖게 되었으며 그 해가 끝나기 전에 많은 부채를 다 청산하고 헌당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홍해작전’은 서울교회에서도 계속 이어져갔다. 1988년 6월 6일을 기해 시작된 홍해작전은 한국교계로부터 ‘길선주목사 이래 최대의 회개운동’이라는 평가를 받았을 만큼 대성황을 이루었다. 그러나 홍해작전은 신호탄에 불과했다. 이후 이종윤 목사의 개혁 드라이브는 더욱 맹렬하게 진행됐다. 모든 제직들이 함께 기도원으로 들어가 훈련을 받도록 하며 제자훈련에 박차를 가했다. 같은 해에 1,800여 명의 아시아교회 지도자들이 참여하는 아시아선교대회를 열었고 또 세계복음주의협의회 교회갱신위원장을 맡아 호주 캔버라에서 열린 WCC 7차 대회에서는 신학 검증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렇게 3년, 그토록 왕성하게 목회 활동을 하던 충현교회를 이종윤 목사가 왜 떠났는지, 어떻게 떠났는지에 대해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 그리고 서울교회로부터 부름을 받기까지 잠시 미국에 머물며 인간으로서 겪기 힘든 짧지만 길고 길었던 인고의 시간을 보내며 세례 요한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보시고 아셨던 예수님이 자신도 보시고 아신다는 사실에 힘을 얻었다. 그리고 겐그레아에서 삭발을 하였던 사도 바울과 같이 비장함으로 삭발을 하고 미국에서 귀국했다. 이종윤 목사는 미국에 머물 때 ‘이 목사가 충현교회를 그렇게 떠나고 교회에 큰 회의를 느껴 이후로는 절을 가려고 한다’는 한 성도의 편지를 받고 정신이 번쩍 들어 다시금 목회에 대한 열정에 불을 지폈다고 훗날 그 때를 회상했다.
1991년 11월 24일 추수감사 주일에 서울 강남구 논현동 건물에 서울교회 간판을 건 이종윤 목사는 더 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고 하나님의 목회를 시작했다. 성도들과 함께 교회 창립의 주역으로 앞장선 이종윤 목사는 서울교회가 민족복음화와 세계선교의 산실이 될 것을 소망하면서 또 하나의 교회가 아닌 ‘다른 교회를 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 을 강조했다.
할렐루야교회에서는 설교로, 충현교회 에서는 기도로, 서울교회에서는 섬김을 위 한 프로그램으로 목회의 지침을 삼았다. 여 기에 '열열히', '성경적으로', '일관성 있게'라 는 수식어를 붙여 열열한 기도, 성경적 설교, 일관된 프로그램이라는 목회지침을 창 안했다.
또 군림하는 목사와 장로를 제자리로 돌려놓고자 목사·장로 안식년제를 시행하였는데 이 안식년제는 훗날 위기에 빠졌던 서울교회를 구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니 하나님의 예비하심이 여기에 있었던 것을 그 누가 알았는가!
비록 그를 키운 친정 교회와 뼈아픈 결별의 시간이 있었지만 요셉을 애굽으로 보 낸 이는 형들이 아니고 하나님이셨다는 요셉의 고백처럼 이종윤 목사는 하나님의 깊은 섭리로 교단의 스펙트럼을 초월한 초교 파적 지도자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이종윤 목사는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을 받은 이후 휴가도 공휴일도 없이 쉼 없이 일을 해 ‘일 중독자’라는 별명을 듣기도 했다.
2010년 5월 9일 주일 찬양예배 시 이종윤 목사는 실로 20년 만에 당시 94세인 김창인 목사와 강단에서 해후를 하였다. 김창인 목사는 충현교회의 당회장으로서 1988년에 자신의 후임으로 이종윤 목사를 세웠고, 3년 뒤인 1991년에는 이종윤 목사의 해임 결정을 내린 장본인이었다. 김창인 목사는 이종윤 목사에게 일평생 아버지와 같은 스승이었고, 김창인 목사에게 이종윤 목사는 자식과 같은 제자였다. 그러나 마지막엔 그런 스승으로부터 오명을 쓰고 낭떠러지 에서 추락하는 경험까지 했지만 이종윤 목사는 은퇴를 앞두고 영원한 스승인 김창인 목사의 자택을 방문하여 사제 관계를 회복 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이종윤 목사는 그의 목회활동을 마무리 하며 에큐메니칼 운동의 산실인 장신대 신대원과 세계적인 보수신학의 요람 웨스트 민스터신대원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서울교회는 2010년 8월 15일에 열린 공동의회에서 이종윤 목사의 원로, 공로 목사 추대를 만장일치로 가결했고, 11월 9 일(화) 서울강남노회 제47회 정기회는 이를 추인했다.
그리고 오늘까지 Man of Church, 교회의 사람 이종윤은 평생 ‘Coram Deo’ 오직 하나님 면전에서 살다가 하나님 품으로 돌아갔다.
허숙 권사(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