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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의 성서번역과 신앙공동체의 형성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의 손에 든 성서는 그 가르침에 푹 빠지게 되며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야 맙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기독교의 역사는 선교사가 파송되어 복음을 전하며 성서를 번역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는 다르다. 한국은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전 의주의 상인 계층이 만주에서 성서번역에 참여하다가 또는 성서를 읽다가 기독교인이 되었고 조선으로 성서를 밀반입하며 신앙공동체를 만들어 나갔다. 의주?평양?장연?서울로 이어지는 의주 상인의 행상로가 초기 한국교회의 발상지와 일치한다는 점에서 초기 한국교회사에서 의주 상인 계층의 중요성이 잘드러난다. 의주가 포함된 관서지방은 한국 최초로 “자립적 중산층”이출현한 곳이다. 의주 상인들은 무역을 통해 일정수준의 경제력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만주어와 한문에 능통하고 셈에 밝아 지적으로도 뒤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관서지방에 대한 지역 차별과 상인계급에 대한 신분 차별로 인해 변두리의 소외된 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유교, 더 정확히는 주자학적 지배질서를 대신한 새로운 사회윤리와 종교를 원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기독교와 만난 것이었다.




 한국의 첫 성서번역과 조선인 세례는 모두 만주에서 이루어졌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의 존 로스(John Ross) 선교사는 조선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1874년 중국과 조선의 중요 무역 거점인 고려문을 여행한 적이 있었다. 이때 전도에 성과는 없었지만 한 의주 상인, 즉 백홍준의 부친을 만나 한국어를 조금 배울 수 있었다.
 로스는 백홍준의 부친에게 한문 신약성서와 다른 책 한 권을 전해주었다. 로스는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조선이 개항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고려문을 여행하다 만난 이응찬을 한국어 어학교사로 고용하였다. 이응찬은 풍랑을 만나 상품을 모두 잃고 무일푼의 처지가 되었던 의주 상인이었다. 당시 조선인이 서양인을 돕는 것은 목숨이 위험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로스가 높은 급료를 주었기 때문에 이응찬은 위험을 무릅쓰고 로스와 일하기 시작했다. 이응찬과 로스는 1877년에 선교사를 위한 한국어 교재 '한국어 첫걸(Corean Primer)'을 발간하였고 1878년에는 이응찬의 동향 친구 몇 명이 합류하여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을 번역하였다. 그 후 이응찬이 잠시 귀향한 사이 1878년 백홍준의 동향인 2명이 선교사를 찾아 만주에 오는 일이 있었다. 백홍준의 부친에게 주었던 성서와 책을 2-3년 읽다가 신앙에 눈을 떠 세례를 받기 원한 이들이었다. 그중 한 명이 1879년 1월 첫 조선인 수세자가 되었다. 두 번째 수세자는 백홍준으로 역시 부친이 받았던 성서와 책을 읽다가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 선교사를 찾아와 “도를 배우고” 세례를 받았다. 성서번역 과정에서 신앙을 얻게 된 이응찬이 잠시 귀향하였다가 복귀하여 그해 7월에 세례를 받았고, 이응찬과 함께온 친척도 성서번역에 동참하다 12월에 세례를 받았다. 이들은 세례를 받은 후 계속해서 성서번역에 참여하거나 고향으로 돌아가 복음을 전했다.



 한편 로스는 이응찬이 잠시 귀국했던 사이 홍삼 장사를 하는 의주 출신 서상륜?서경조 형제를 만났는데 이들 중 서상륜은 로스의 성서번역을 잠시 돕다 세례를 받았다. 이런 만주의 한국인들은 적어도 1880년부터는 8명 이상이 모여 정기적인 한국어 예배를 드리며 신앙공동체를 형성했고 국내에 성서를 반입하여 복음을 전하고자 했다. 이에 영국성서공회는 1882년 10월 서상륜을 최초의 권서(성서 판매 행상인이자 전도인)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서상륜의 고향인 솔내에 한국 최초 교회인 소래교회가 자생적으로 창립되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의 손에 성서를 들려주는 일은 매우 위험(?)하다. 그들은 반드시 성서의 가르침에 푹 빠지게 되며 위험과 손해를 감수하고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야 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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