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에는 조선의 근대화와 관련된 무수한 최초들이 있다. 다양한 문화의 영역에서도 정동은 말 그대로 근대화의 요람이라 불릴만하다. 정동이 역사적 공간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에는 기독교의 영향도 적지 않다.
서울 중구의 정동은 한국 근대화의 요람이라 불린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정동은 아관파천 이후 고종의 왕궁으로 사용된 경운궁(덕수궁)과 그 주변에 서양 각국의 공사관과 영사관들이 자리하고 있는 근대 외교와 정치의 중심지였고 서구문화가 조선인과 밀접하게 만나는 첫 공간이었다. 공사관을 중심으로 서양인들의 집단 거주지가 형성되면서 서양의 생활양식과 문화가 유입되었다.
정동에는 조선의 근대화와 관련된 무수한 최초들이 있다. 조선 최초의 근대식 학교인 배재학당, 최초의 여성교육 기관인 이화학당, 최초의 근대식 공립교육 기관인 육영기관, 최초의 현대적 보육원으로 알려진 언더우드학당 등 조선의 근대교육의 출발을 알린 학교와 기관들도 모두 정동에 있었다. 최초의 순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의 신문사 사옥이나 한국 최초의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되었던 정동제일교회, 최초의 서양식 파티가 열렸다는 손탁호텔, 한국 최초의 여성전문병원인 보구여관 등 다양한 문화의 영역에서도 정동은 말 그대로 근대화의 요람이라 불릴만하다.
정동이 역사적 공간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에는 기독교의 영향도 적지 않다. 위에서 언급한 배재학당, 이화학당, 언더우드학당, 정동제일교회, 보구여관 등은 모두 기독교의 선교기관이었다. 이렇게 많은 선교기관이 정동에 옹기종기 모여있게 된 것은 선교 초기 미국 북장로회와 북감리회의 선교 스테이션(Mission Station: 선교지부 또는 선교거점)이 정동에 자리하였기 때문이다. 선교 스테이션이란 선교사의 일상생활과 전도?의료?교육 등이 복합적으로 이루어지는 선교거점을 의미하는데 정동의 선교 스테이션은 한국에 조성된 첫 선교 스테이션이었다.
알렌이 첫 정주 선교사로서 정동에 사택을 마련한 이래 제중원을 통해 입국한 미국 북장로회와 북감리회의 선교사들은 정동에 차례로 사택을 마련하고 스테이션 부지를 조성해 나갔다. 장로회의 스테이션은 지금의 중명전과 예원학교 일대, 그리고 이화여고 자리의 일부에 자리 잡았고 감리회의 스테이션은 바로 길 맞은편인 정동제일교회, 배재빌딩, 이화여고 일대에 위치하였다.
이어 1890년 한국 선교를 시작한 영국 성공회가 장림성당을 건축하며 정동에 합류하고 1900년 러시아 공사관에서 활동을 시작한 정교회가 1903년 성 니콜라스 성당을 건립하고 자리잡게 되면서 정동은 다양한 교파가 공존하는 지역으로 변화해 갔다. 1926년 구세군이 신학교인 구세군 사관학교를 정동에 건립하자 그 다양성은 더욱 풍성해졌다. 이렇듯 정동은 첫 선교 스테이션의 자리이면서 동시에 다양한 교파가 공존했던 지역으로서 한국 기독교의 요람이라 불리는 것이다.
현재 정동에는 감리회, 성공회, 구세군의 선교 유적들은 남아있지만 장로회와 정교회의 유적은 남아있지 않다. 정교회는 원체 교세가 작아 성 니콜라스 성당 외에는 건물이나 기관을 세우지 않았다. 러일전쟁의 패배로 일시적으로 러시아인들이 일제에 의해 조선에서 추방되기도 하였고 1917년 러시아가 공산화되면서 본국에서도 교회가 핍박을 받게 되자 적극적으로 해외 선교에 나설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 니콜라스 성당은 1967년 마포구로 이전하였다.
하지만 장로회에는 많은 기관들이 있었다. 장로회의 기관으로는 고아원으로 시작한 언더우드학당(현 경신중고등학교와 연세대학교),여성교육기관 정동여학당(현 정신여자중고등학교), 한국 최초의 장로교회이자 조직교회인 정동교회(현 새문안교회)가 있었다. 나아가 장로회 스테이션에서는 교파를 뛰어넘는 선교 연합기관, 성서번역위원회(현 대한성서공회)와 조선성교서회(현 대한기독교서회)가 출발하였다. 하지만 고종이 경운궁을 확장하기 위해 장로회 선교 스테이션 부지를 매입하고자 했기 때문에 장로회 선교사들은 1902년 종로구 연지동으로 이전하였다. 따라서 장로회 서울 선교 스테이션의 흔적은 연지동에 일부 남아있을 뿐 정동에서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