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세력에 대한 불신과 기독교에 대한 경계가 가득했던 조선에서 선교기관들이 빠르게 근대화를 이끌어가는 기관이 될 수 있었던 것에는 조선 왕실의 지원이 있었던
··· 왕실의 공인을 받은 이후 서양인 학교는 조선인에게 새로운 세상을 밝히는 빛으로 보였다
정동에 기독교 선교기관을 먼저 설립한 것은 감리회였다. 감리회의 의료선교사 윌리엄 스크랜턴은 제중원에 합류한지 한달 만에 사임하고 별도의 병원을 설립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는 관민합작 성격의 제중원은 온전한 선교기관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 아니라 가난한 이들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병원을 만들고자 했다. 스크랜턴은 1885년 9월 10일 자신의 집 방 하나를 개조하여 진료소를 열었는데 가난한 이들이 몰려들어 수요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아예 기와집 한 채를 구입하여 병원으로 개조하였다.
병원은 특별한 이름이 없어 “미국인 의사병원”이라는 간판을 걸었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어떤 병에 걸렸든지 매일 열시에 빈 병을 가지고 미국 의사를 만나시오”라는 문구를 붙였다. 누구든 약을 담아 갈 빈 병 하나만 가지고 온다면 무상으로 치료해 주겠다는 의미였다. 병원은 성황을 이루었는데 스크랜턴이 가난한 이들에게는 돈을 받지 않았기에 병원은 성황을 이룰수록 적자였다. 이를 지켜본 고종은 1887년 4월 스크랜턴의 병원에 ‘시병원’이라는 이름을 지어 보내고 건물 경비원에 해당하는 기수를 배치해 주었다. 이름과 기수의 하사는 조선 왕실이 이 기관을 공인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정부의 공인은 선교사업 초기에 큰 도움이 되었다.
스크랜턴에게 환자가 몰려왔던 것과는 달리 교육선교를 담당했던 그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은 학생 모집에 부진을 겪었다. 메리 스크랜턴은 내한하자마자 사택 인근의 초가집 19채와 일대 언덕을 매입하고 언덕을 깎는 대규모의 부지조성 공사를 벌여 1886년 11월 200여 칸이나 되는 큰 집을 완공했다. 메리 스크랜턴은 공사가 한창이었던 1886년 5월부터 호기롭게 여성교육에 나섰지만 서양인에 대한 경계에 더불어 여성교육에 대한 가부장적 인식으로 학생 모집이 쉽지 않았다. 때로는 서양 도깨비에게 딸을 팔아넘겼다는 비난을 이기지 못한 부모가 학생을 데려가려 하자 ‘부모의 동의 없이는 조선에서 10리 밖으로 아이를 데리고 가지 않겠다’는 각서도 써야 했다.
메리 스크랜턴의 돌파구는 역시 학교명을 하사받는 것이었다. 1887년 1월 메리 스크랜턴은 정부의 고위관리를 초청하여 그동안 여성교육의 성과를 보여주면서 학교명을 받아달라고 부탁했고 그 자리에 참석한 외서독판 김윤식이 학교가 왕의 신임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김윤식은 여성교육을 위해 조정이 은혜를 베풀 것을 건의하였고 조선 왕실은 같은 해 2월 ‘이화학당’이라는 이름과 기수를 하사하였다.
아펜젤러도 학생 모집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아펜젤러는 1885년 8월부터 스크랜턴의 부탁을 받아 의사가 되고자 하는 조선인 두명 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에는 영어를 배우고자 하는 청년이 많았기에 학생이 조금 늘어났다. 아펜젤러는 이에 힘을 얻어 여러 가옥과 부지를 매입하고 1886년 6월 8일 정식으로 학교를 열었다.
그러나 기대만큼 학생이 오지 않았다. 첫 학기를 시작할 때 학생은 고작 6명이었다. 조선 청년들은 서양 세력과 왕실의 관계가 언제 틀어질지 모르고, 관계가 틀어질 경우 자신들이 위험한 상황에 놓일 것이라 걱정했다. 결국 학생들은 아펜젤러에게 학교에 대한 정부의 정식 인가를 받아달라고 요청했다. 아펜젤러는 다시 김윤식을 통해 고종에게 학교명을 지어달라고 부탁했고 1887년 2월 21일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청년들의 우려가 불식된 이후 아펜젤러의 선교사역은 빠르게 성장했다.
이화학당을 시작으로 배재학당, 시병원이 차례로 왕실로부터 이름과 기수를 받게 되면서 감리회의 선교사업은 시작한지 약 1년 만에 정부의 공인과 보호를 받는 사업이 되었다. 서양 세력에 대한 불신과 기독교에 대한 경계가 가득했던 조선에서 선교기관들이 빠르게 근대화를 이끌어가는 기관이 될 수 있었던 것에는 조선 왕실의 지원이 있었던 셈이다. 왕실의 공인을 받은 이후 서양인 학교는 조선인에게 새로운 세상을 밝히는 빛으로 보였다. 독립운동가 김란사는 이화학당 입학 당시 프라이(Lulu Frey) 선교사에게 자신을 받아달라며 이렇게 간청했다.
“내 인생은 이렇게 밤중처럼 캄캄합니다. 나에게 빛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