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전인적 건강을 도모하다
YMCA(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 기독교청년회)는 영국의 기독교인들이 산업혁명 직후인 1844년 결성한 청년단체이다. YMCA는 혼란한 사회 속에서 청년들의 정신적?영적 상태의 개선을 목적으로 활동하였다. YMCA의 기본은 독일 경건주의 신앙에 따른 정신적 각성, 만인사제론에 따른 평신도성의 자각, 선교에 대한 열정과 기독교 정신으로의 일치를 원칙으로 하였다. 시대적 요청에 대한 기독교의 응답이었던 YMCA운동은 유럽 전역으로 급속히 확산되었고 11년 뒤인 1855년에는 파리에서 세계YMCA연맹이 결성되었다.
1899년 서울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과 조선 청년 150여 명은 조선에도 YMCA가 필요하다고 여기고 세계연맹에 YMCA운동을 위한 건물을 세워줄 것을 요청하였다. 한국의 초기 개신교 선교는 양반 계층보다 사회적 신분이나 교육 수준이 낮은 계층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는데 선교 대상의 폭을 넓혀 상류계층의 청년들에게도 기독교를 전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계연맹은 전문 간사가 없는 곳에 회관을 건립하는 것은 정책에 맞지 않다고 거부하였지만 국제위원회 총무인 존 모트(John R. Mott)는 긍정적인 입장이었다. 모트의 지시로 1900년 한국을 방문해 현지 조사를 한 국제위원회 수석간사 라이언(D. W. Lyon)은 조선YMCA의 설립을 긍정적으로 보고하였다. 국제위원회는 이 보고에 기초해 1901년 질레트(Phillip L. Gillette)를 전문 간사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1901년 9월 조선에 도착한 질레트는 1903년 3월에는 회관의 건축과 조선YMCA 설립을 위한 준비를 거의 완료하였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1903년 10월 28일 37명의 발기인 및 동지가 헐버트를 위원장으로 창립총회를 열고 황성기독교청년회(현 서울YMCA)를 창립하였다. 초대 이사는 13명이었는데 조선인은 2명이었고 나머지는 외국인(미국, 캐나다, 영국, 일본)으로 선교사와 YMCA 관계자였다. 이 외국인들에는 장로회, 감리회, 성공회의 인사들이 두루 참여하고 있어 기독교 연합기관의 성격이 잘 드러났다.
황성기독교청년회는 YMCA의 사중목적사업에 입각해 활동을 시작했다. 사중목적사업(Fourfold Program)은 YMCA의 전인교육 이념으로 덕?지?사교?체(spiritual, mental, social, physical)의 훈련을 통해 시민사회의 주체를 길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황성기독교청년회는 종교부, 교육부, 체육부, 사교부의 조직을 만들고 각 부서 사업의 통일성을 기하기 위한 평의회로 의사부를 두었다. 그리고 기독교적 시민 주체를 만들어 내는 문화적 공론장, 정치적 공론장을 만들고 민족의 독립과 국가의 부강을 도모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이의 일환으로 근대 스포츠 보급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질레트가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는 점이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내한할 때부터 취미생활을 위해 간단한 야구도구를 챙겨왔는데 조선인들이 야구에 관심을 보이자 1904년부터 아예 YMCA회원들을 대상으로 야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지금의 한국 프로야구로 이어지는 한국야구 역사의 시작이었다. YMCA가 1910년 전까지 조선에 보급한 스포츠는 야구 외에도 축구, 농구, 유도, 체조, 육상, 검도 등으로 다양했다. 현재 우리가 즐기고 있는 다양한 스포츠의 출발점에는 대개 YMCA의 영향이 스며들어 있다.
또한 YMCA는 1906년부터 매년 대운동회를 개최하고 스포츠를 널리 알리면서 회원들의 친교를 도모했다. 그러나 YMCA의 대운동회는 1909년을 마지막으로 일제의 방해로 중단되고 말았다. 다른 운동회들은 문제없이 유지되는 와중에 유독 YMCA의 운동회만 사회풍조를 이유로 금지되었는데 이는 YMCA운동회가 가지고 있는 민족주의적 성향이 일제의 입장에서는 식민 지배의 커다란 장애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YMCA는 전인적으로 건강한 인간이 나라의 부강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여겼고 체육의 보급 역시 그러한 맥락 속에서 진행되었다. 따라서 운동회를 마친 후의 진행된 친교모임은 민족의 자주를 염원하는 청년들의 성토장이 되기 일쑤였는데 일제의 입장에서는 영 달갑지 않은 일이었음은 분명했다. 이후 YMCA의 체육은 일시적으로 민족주의적 성향과 거리를 두다가 1920년대에 신기준이 체육부 간사로 임명되면서 그 성향을 되찾았다.
이후로도 기독교는 한국 스포츠 역사 곳곳에 그 흔적을 남겼다. 숭실학교 축구부는 1927년 일본전국고교축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망국의 설움을 위로하였다. 1936년 베를린에서 마라톤 우승으로 한국인에게 자긍심과 희망을 주었던 손기정의 코치도 ?성서조선?의 발행인으로 알려진 무교회주의 기독교인 김교신이었다. 기독교는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뛰어넘는 영향을 사회 곳곳에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