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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운동의 요람, 상동청년회
 ‘상동청년회’는 한국 민족운동의 요람으로 알려져 있다. 이 청년회의 정식 명칭은 상동엡 웟청년회이다. 엡웟청년회는 1889년 5월 미국에서 시작된 감리회 청년신앙운동단체의 명칭이며 한국에서 가장 먼저 생긴 기독교 청년단체로도 알려져 있다. 웹웟은 감리회의 창시자인 웨슬리의 고향인 엡워스(Epworth)에서 따온 것인데 엡웟청년회는 웨슬리의 정신을 따라 신앙훈련은 물론 사회봉사를 목적으로 하였다. 이상의 내용으로 짐작할 수 있듯이 상동 청년회는 감리회 교회인 상동교회의 엡웟청년회를 말한다.
 1897년 조선에서도 엡웟청년회가 결성되었다. 면목상의 지도자는 평양 선교사 노블(W. A. Noble), 인천과 강화의 선교사 존스(G. H. Johns)였지만 실질적으로 청년회를 이끌었던 이들은 윤치호, 서재필, 전덕기 등의 조선 청년들이었다. 이 조선 청년들은 대부분 독립협회에도 관계하고 있었기 때문에 엡웟청년회와 독립협회는 인적 구성이 상당 부분 겹치고 있었다.
 한편 상동교회는 의료선교사인 스크랜턴에 의해 설립되었다. 스크랜턴은 정동의 시병원을 운영하다가 지금의 상동교회 자리로 옮 겼다. 정동은 외교관과 조선의 고관대작이 밀 집해 있어 민중이 자유롭게 찾아오기 어려운 곳이었다. 스크랜턴은 시병원에서도 가난한 이들을 무료로 진료하였지만 더 많은 이들에게 의료혜택을 제공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 다. 결국 그는 외국인이 살기에 안락한 정동에서 민중이 사는 곳을 찾아 떠나 남대문 근처로 이동했다. 그는 부지를 매입하고 약국과 병원 을 차렸는데 병원 안에 예배실을 설치해 의료 선교와 복음선교를 함께 추진하였다. 1893년 이 병원교회가 정식으로 구역회로 승격되면서 스크랜턴이 담임목사로 임명되었다.
 독립협회가 고종의 명령으로 해산되었던 1898년 상동교회에서는 엡웟청년회가 결성되었다. 상동청년회는 중간에 조선 청년들의 독립의지가 지나치게 정치적이라는 것을 우려 한 선교사들에 의해 잠시 해산된 적도 있지만 1901년 7월 스크랜턴이 모친의 병환으로 미국으로 돌아가자 다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특히 평신도로서 스크랜턴의 목회를 돕던 전덕기가 1903년 상동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자 상동청년회의 민족운동은 전성기를 맞이하여 서울과 인천, 평양 등지의 다른 교회 청년회와 연대하는 한편 지방에 지회까지 설립할 정도가 되었다.
 민족지도자로 이미 이름이 알려진 전덕기를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상동청년회로 몰려들었다. 상동청년회는 상동교회 교인은 정회원, 교인이 아닌 사람은 준회원으로 받아들 였다. 기독교 신앙인이 아니더라도 구국의 의지를 가진 애국지사라면 그 동참을 막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회원으로 정식 가입하지는 않더라도 민족운동을 지지하는 이들이 후원회원로 참여하였다. 그 결과 상동청년회는 대표적인 인물을 추리기도 힘들 정도로 어마어마한 인사들이 포진하게 되었다. 그 중 김구, 이승만, 안창호, 이동휘, 이동녕, 이회영, 이시영, 우덕순, 이준, 이상설, 주시경, 정순만, 현순 등 은 한국 독립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사람들이 었다.
 상동청년회의 민족운동 중 널리 알려진 것 은 1905년 “멕시코 이민교포학대 조사단 파견”, “을사조약 무효 상소운동”, 1907년 “헤이 그 밀사 파견”이다. 1907년 조직된 비밀결사단체 신민회 역시 상동교회 지하실에서 조직되었다. 이 지하실은 헤이그 밀사가 논의되던 바로 그 방이었다. 일제도 이 모든 일의 배후에 전덕기 목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전덕기 목사가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심한 고문을 받은 후유증으로 소천하자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슬프다, 오늘날 세상을 떠난 전덕기 씨여”로 시작하는 장문의 기사를 내었다. 전덕기와 적대했던 일제마저도 그의 죽음에 슬픔을 표해야 할 정도로 조선인들 사이에서 전덕기를 향한 존경과 사랑이 대단했기 때 문이다. 전덕기의 장례식에는 애국지사는 물론 가난하고 병든 사람, 사회적으로 무시 받는 천민과 창기들까지 몰려들었다.
 한 선교사가 편안한 곳을 떠나 가난한 이들을 찾아 왔다. 그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된 자에게 해방을, 억눌린 자에게 자유를, 고통받는 자에게 평안을’ 주는 것이 자신이 가진 선교사로서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선교사가 가진 복음의 정신은 그의 제자에게 이어졌다. 그의 제자는 민중을 위한 목회에 헌신하면서도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향한 열정을 불태웠다. 악한 이들은 그를 두려워했고, 의지 할 곳 없는 이들은 그를 사랑했다. 그리고 뜻을 가진 이들은 그의 동지가 되었다. 상동청년회는 그렇게 출발하여 한국민족운동의 요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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