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이민과 한인교회
우리나라 최초의 공식 해외 이민은 1902년의 하와이 이민이다. 하와이는 사탕수수 농사에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1876년부터 중국인 노동자를 받아들였는데 중국인 세력이 너무 커지자 서서히 중국인 이민을 제한하다가 1897년 완전히 금지하였다. 중국인을 대신한 것은 일본인이었다. 하지만 일본인 이민자 역시 그 수가 늘어나자 자주 파업을 일으켰고 중국인과 마찬가지로 사탕수수 농장과의 계약이 만료되면 도시로 진출하여 현지인들과 마찰을 일으켰다. 결국 중국과 일본이 아닌 제3국의 노동자가 필요해졌는데 그것이 한국이었다. 그런데 이 하와이 이민에 한국교회가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선교사를 사임하고 주한 미국공사로 활동하던 알렌은 1902년 휴가를 마치고 조선으로 복귀하던 중 샌프란시스코에서 하와이 사탕수수경작자협회의 이사 어윈(Wm. G. Irwin)을 만나 하와이에 한국인 노동자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한국에 돌아온 그는 1901년에 든 흉년으로 고민하던 고종에게 백성을 하와이로 보내 척식사업(拓植事業)과 신문화를 도입하자고 건의하였다. 이 건의를 받아들인 한국 정부는 이민 사업을 관장할 ‘수민원’을 설립했다. 수민원의 미국 측 파트너는 데쉴러(David W. Deshler)가 설립한 ‘동서개발회사(東西開發會社)였는데 데쉴러는 알렌이 이민자 모집의 미국 측 책임자로 위탁한 사람이었다.수민원과 동서개발회사는 합동 ‘이민 공고문’을 발표하였다. 공고문의 내용은 매일 10시간 노동, 일요일 휴무, 월 15달러 임금 등을 비롯한 노동조건과 하와이의 소개였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한국인의 반응이 너무 없었던 것이다. 이전에도 한국인이 해외로 이주한 경우가 없지 않았고 연해주와 간도에는 제법 큰 규모의 한국인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이전의 이주는 정부의 허락과 지원을 받은 공식적인 이민이 아니었다. 공식 이민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일지 전혀 알 수 없었던 한국인이 망설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에 한국정부는 해외이민의 절차나 과정에 무지하여 효과적인 모집을 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이민에 호응한 것이 교회였다. 특히 감리회의 참여가 활발하였다. 그 계기는 이민자 지원이 부진하자 데쉴러가 제물포에서 활동하는 감리회의 존스 선교사(George H. Jones)에게 협조를 요청한 것이었다. 데쉴러가 존스를 찾아왔던 것은 아마도 동서개발회사에서 통역과 사무원으로 근무하던 한국인들이 존스 선교사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감리교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 존스는 감리교인들에게 하와이 이민을 권장하였고 존스의 설득은 꽤 효과적이었다. 1902년 12월 121명의 첫 이민자가 하와이로 출발한 이래 1905년까지 7,226명이 하와이로 이주하였는데 하와이 이민이 시작되자 제물포 지역의 감리교회 교세가 급감하여 다른 선교사들이 존스를 원망할 정도였다. 특히 교회의 일꾼으로 오랫동안 훈련받던 젊은 한국인 지도자들도 이민자의 통역이나 신앙 지도를 위해 함께 떠나면서 교회는 지도력에 큰 공백까지 생겨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하지만 하와이에 도착한 한국인 중 많은 수가 기독교인이고 종교적 열심과 지도력을 갖춘 인물이 적지 않았던 것은 하와이 한인사회에는 좋은 일이었다. 금새 한인교회가 여기저기에서 생겨나기 시작했다. 홍치범, 임정수, 현순 등의 주도로 오하우섬에서 첫 교회가 조직되었고 홍승하와 윤병구는 현지 미국인 목사들의 도움을 받아 여러 섬에 흩어져 있는 한국인들을 전도하였다. 이런 활동들에 힘입은 한인교회는 빠르게 성장했다. 1906년 경 한인교회는 13개의 교회와 35개의 전도소를 보유하였을 뿐 아니라, 수십 명의 목사와 전도사가 활동하고 있었다. 앞서 언급했듯 1905년 하와이의 한인 수가 7,226명임을 감안하면 그 규모는 더욱 크게 느껴진다.
이렇게 교회가 중요한 구심점이었던 하와이의 한인사회는 지속적으로 한국교회와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한국교회는 하와이에 꾸준히 관심을 갖고 교회 지도자를 파송하였고 한인사회는 자신들의 생활이 안정되기 전부터 한국교회와 교회 교육사업을 지원하였다. 1904년 상동교회가 이승만을 교장으로 상동청년학원을 설립하려고 하자 적지 않은 후원금을 보냈던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당장에 제물포 지역의 감리교회들은 교인과 인재들을 잃었을지 모르나 이는 더 큰 섭리의 일부분이었다. 훗날 하와이의 한인교회는 고국을 떠나온 이들을 위로하고 결집시키는 신앙공동체이자 한국 민족운동의 중요한 거점으로 성장해 나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