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날: 믿음을 보시고 고치시다(막 2:1-12)(12)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의 집에 계실 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곳은 이미 예수님의 소문이 확장일로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집에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이때 병 고침을 받기 위해 환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은 문으로는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음을 알고 지붕으로 올라가 구멍을 뚫고 마당으로 환자를 내려놓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중풍병 환자를 보시고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중풍병자가 본문에는 회개했다는 말도 없고 자신의 죄를 깨달았다는 말도 없는데 주님은 그를 향하여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십니다. 아마도 그 중풍병 환자는 말은 하지 못해도 어떻게라도 자신이 죄 용서함을 받고 병 고침도 받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그곳으로 왔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사람의 간절함을 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이요 애통하는 마음입니다.
죄 사함은 죄를 사해 줄 수 있는 권세가 있는 사람이 사하여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 사함의 권세가 자신에게 있음을 스스로 말씀하십니다.(10절) 예수님의 의도는 매우 분명합니다. 모든 일의 배후에는 죄가 있고, 죄를 사해주는 권세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것을 아시고 이 권세를 드러내시기 위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주신 첫 번 메시지가 "회개하라"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먼저 하라'는 것이 몇 가지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의 공통점은 회개하라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회개하고 죄 사함 받는 일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그 일을 위해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고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다 이루었다”인데 이 말씀은 인간이 하나님께 용서받고 구원받는 길을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11절) 여기에 일어나라, 들어라, 가라는 세 가지 단어가 나옵니다. 이것은 일어날 수 있는 힘과 들 수 있는 힘과 집으로 걸어서 돌아갈 수 있다는 것, 곧 온전한 치유를 의미합니다. 행 3장에 미문의 걷지 못하던 자도 걷고 뛰고 하나님을 찬미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에게 임한 것도 전인적인 치유요 완전한 회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치시되 일부분이 아닌 전체를 고치시는 분이십니다. 육신을 고치시고 병든 마음을 고치시고 잘못된 관계를 정리하게 하시고 삶의 그릇된 습관 등을 전방위적으로 고치시는 은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치유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12절) 군중들은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님을 보고 이분이 누구인지 의문을 갖게 되었고 마침내 "이 분이야말로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아이시다"라는 결론을 스스로 내리게 됩니다. 예수님이 행하셨던 기적은 병 고치시는 일, 귀신을 쫓아내시는 일, 자연을 다스리시는 일,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일 네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통해서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을 알아보게 하시고 알아보는 사람마다 믿음으로 영접하게 하시고 영접하는 자들마다 하나님의 자녀로 성별하시는 축복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궁극적으로 배워야 할 진리는 예수가 우리의 구주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상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지만 그는 상만 들고 간 것이 아니라 자기를 살리신 예수님을 가슴에 품고 돌아갔습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소원합니다.
둘째 날: 비웃음을 넘어 고치시다(마 9:18-26)(26)
사람은 감정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자극을 받으면 과도하게 흥분하기도 하고 몹시 실망하고 스스로 자괴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신앙의 용기를 상실하거나 뒤로 물러가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일생동안 비웃음과 멸시와 조롱을 당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권력자들이나 당대의 지도자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바라보면서 저 무리들이 무슨 일을 하겠느냐며 비아냥거렸습니다. 예수님이 가까이 하시는 사람 또한 세리나 죄인들이나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들 뿐이니 이 사람이 무슨 큰일을 하겠는가 하고 비웃었던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조직과 체계도 없이 일하시는 방법을 보고도 많은 사람들이 비판했습니다. 심지어는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것이 옳은 것인지에 대한 회의감을 많이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사역 중반기 즈음에 천국 비유의 말씀을 주시며 사람들 눈에는 다 없어지고 실패하는 것 같으나 하나님의 나라는 반드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 때가 올 것이라고 소망에 찬 말씀을 제자들에게 들려주시면서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므로 아무 염려 말라고 제자들을 격려하십니다.
예수님을 조롱하고 비아냥거리는 소리는 평생 예수님을 따라다녔고 마지막 십자가에서까지 들려졌습니다.(마 27:28-29) 그러나 예수님은 흔들리지 않고 십자가를 향해 자기의 길을 가셨습니다. 우리는 멸시와 조롱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가신 예수님의 이 모습을 믿음으로 사모하고 본받아 용기와 담대함으로 믿음의 길을 가게 하시는 성령의 능력이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고 있던 여인을 고치시고 죽은 소녀를 살리시는 큰 역사를 행하셨습니다. 이 현장에서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인은 예수님의 뒤로 와서 가만히 그 겉옷 가를 만졌습니다.(20절) 그 여인에게는 예수님의 옷만 만져도 자신의 병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고 예수님께서도 이 여인의 믿음을 인정하셨습니다.(22절) 아마도 이 여인은 자신의 부정한 질병 때문에 혹은 여성이라는 이유 때문에 담대하지 못하고 소극적으로 예수님의 옷만 만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인을 회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안심하라’(22절), 다시 말해서 자신감을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은 아이를 살려달라는 야이로는 얼마나 담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까? 예수님은 당당하고 담대한 청을 들으시고 즉시로 일어나셔서 죽은 아이에게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비웃는 사람들 앞에서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신감을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너무나 소중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보배로운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며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을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누구도 차별하여 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은 멸시와 천대와 조롱과 침 뱉음을 혼자 다 가져가시고 우리에게는 평안과 자유와 구원을 주시는 은혜를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의 품으로 모두 나아가시는 한 날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셋째 날: 탄식하며 고치시다(눅 9:37-43)(43)
일은 벌어졌는데 감당할 능력이 내게 없을 때 우리 안에서는 탄식이 터져나옵니다. 이러한 탄식은 연약한 우리들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예수님께서도 하셨다고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말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탄식을 하시기도 하지만 탄식을 고치시는 분이시기도 합니다.(사 21:2) 하나님은 우리 슬픔과 탄식이 우리의 삶에서 사라지게 하시는 분이십니다.(사 35:10, 51:11)
예수님은 세상에 오시어 사역하시면서 당시에 일어나는 일들을 보시고 마음에 적잖은 걱정과 탄식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특히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도무지 무너지지 않는 교만과 완고함을 보시고 탄식하였습니다.(막 8:12)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도 우리를 보시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셨습니다.(롬 8:26) 하나님은 우리의 탄식과 슬픔을 방치하지 않으시고 능력과 사랑으로 건져 내시고 치유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신령한 변화를 경험하시고 내려오셔서 처음 만난 사건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귀신 들린 한 아이의 아버지가 주님의 고치심을 바라고 찾아왔습니다. 이 아이는 이미 제자들이 병 고침을 시도했지만 고쳐지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현장에 오신 것입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한달음에 예수님께로 달려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아이를 고쳐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41절)라고 탄식하십니다. 예수님은 어째서 이렇게 탄식하셨습니까? 먼저는 아이를 보시며 악한 영에게 농락 당하는 인생의 연약함에 탄식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아이에 대해 무한 책임을 가진 아버지의 무능함을 보시고 탄식하셨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예수님의 탄식은 제자들의 무능함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주셨습니다.(마 10:1, 막 6:12-13)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권능도 받았고 사명도 받았고 병을 고친 경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안됩니다. 이것은 어쩌면 우리 개인의 모습일 수도 있고 교회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실망스러운 상황을 가슴에 안고 역사하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41절) 이와 같이 예수님께로 나오는 것이 문제 해결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로 나오는 것에 길이 있고 능력이 있고 문제의 해결이 있습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무능한 지도자의 표상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만난 후 자신의 무능이 믿음 없음에서 비롯된 것을 알고 예수님께 “나의 믿음 없는 것을 고쳐주소서!”라고 간구합니다. 우리는 문제에만 집착하거나 현실만을 보지 말고 믿음 없는 자신을 먼저 돌아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롬 1:17) 작은 믿음에서 큰 믿음으로, 무능한 믿음에서 능력있는 믿음으로 내 문제만이 아니라 시대의 십자가를 질 수 있는 믿음으로 성숙해 가는 축복이 여러분께 있으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제자들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무능을 호통치시며 “기도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일을 많이 하겠다고 설치는 것보다 기도를 많이 해야 됩니다. 기도가 사역이고, 기도가 노동이요 기도가 십자가입니다. 현대교회의 질병은 ‘기도 부족증’입니다. 그래서 전에는 했던 일을 지금은 못하는 것입니다. 과거 한국교회의 자랑은 기도 많이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장도 가능했고 역사를 견인하는 능력도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기도하는 교회로 돌아가야 합니다. 기도하면 승리합니다! 기도하면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넷째 날: 38년의 절망을 고치시다(요 5:2-15)(15)
절망은 바라볼 것이 없게 되어 모든 희망이 끊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자기 한계에 부딪치면서 습관적으로 절망감에 빠지곤 합니다. 절망의 감정은 스스로 치유할 수 없는 것이어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상황을 극복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에 모든 신앙인들은 절망의 상황이 찾아올 때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시 40:1) 시인은 깊은 웅덩이와 수렁에서 절망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건지심을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본문에는 38년 된 병자가 등장합니다. 38년이나 병석에 있었던 이 사람은 매우 절망적이었을 것입니다. 베데스다 못의 물이 움직일 때 제일 먼저 들어가는 자의 병이 낫는다고 해서 그곳에 오긴 했지만 혼자의 몸으로는 움직일 수조차 없어서 물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했습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 빠져있는 그에게 희망이 찾아왔는데, 그 희망은 바로 이 병자가 있는 자리에 찾아오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때는 유대인의 명절이었습니다. 명절의 예루살렘은 사람들이 매우 많이 몰려들어 거리마다 골목마다 사람들로 인산인해가 됩니다. 그러나 명절에 예루살렘을 찾으신 예수님은 사람이 많은 곳이나 노래소리 가득한 거리로 가시지 않고 병자들이 가득한 베데스다 못가로 가셨습니다. 이 못가로 오신 예수님은 모든 병자들의 희망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절망을 극복하고 새로운 희망을 찾아 용기를 가지고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출발점은 예수님께서 내 삶에 임재하시면서부터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내 삶의 한 가운데 임재해 계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언제나 우리 가운데 계신 분이십니다.(요 1:14) 우리는 우리의 삶 가운데 계신 예수님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는 희망으로 새롭게 인생의 등불을 켤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아프고, 슬프고, 고통스러운 사람들이 가득한 베데스다 연못에도 함께 계셨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날마다 실망하고 상처받는 삶을 수십 년 살았지만 예수님이 그에게 오신 순간 그의 삶에는 빛이 비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화려한 곳에 계시지 않고 눈물 흘리고 고통당하고 아픈 상처를 부여잡고 사는 절망적인 사람들 곁으로 찾아오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이 유독 38년 된 병자를 찾으신 것은 그가 이미 병이 오래된 줄을 보시고 아셨기 때문이었습니다.(6절) 예수님의 눈에는 그 사람이 가장 절망적으로 보였고, 가장 처참해 보이셨습니다. 더구나 이 사람의 병은 죄 때문에 생긴 것이었습니다.(14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 그 사람을 찾아가 병을 고쳐주시고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십니다.
38년 된 병자는 베데스다 못 가에서 가장 먼저 예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된 자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가장 먼저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아니면 도무지 살 수 없는 사람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먼저 된 자는 항상 겸손해야 됩니다.
예수님은 그 병자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십니다.(8절) 이것은 완전한 치유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긴 세월 자신을 받쳐주었던 자리 하나도 소중하고 고맙게 여기며 지난 날을 잊지 말라는 뜻입니다.
먼저 은혜 받은 우리는 주의 은혜가 아니면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갈 수 없었던 절망적이었던 존재였음을 깨닫고 믿음으로 평생을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다섯째 날: 열 사람을 함께 고치시다(눅 17:11-19)(19)
이 땅에 처음 오셨던 선교사들은 이 땅에 버려진 나병환자들의 가슴 아픈 사연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갔습니다. 당시 전국의 모든 나병환자 병원이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졌고, 나병환자들은 그들에게 돌봄을 받고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운 삶의 마지막 순간들을 선교사의 품에서 마감했습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처음 들어왔을 때 이 땅에는 미신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당시 전주예수병원에서 선교사들이 쓴 일지에 의하면 병원을 찾은 병자 대부분이 질병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어서 모두가 조상을 잘못 모셨다거나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해서 병에 걸렸다는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돌봄과 치료와 회복이 필요한 때에 주님이 이 땅에 찾아오셔서 우리나라 전체를 고치셨습니다.
이런 선교사들의 정신은 성경에서 나병환자들을 끔찍이 사랑하시던 예수님의 정신을 본받고자 했던 것으로 이들의 헌신은 참으로 아름다운 신앙 선진들의 발자취입니다.
마태복음의 순서를 보면 예수님은 먼저 산에 올라가셔서 산상수훈을 가르치십니다. 구약의 사람들이 율법을 원칙과 헌법처럼 받아들였다고 한다면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하나님 나라의 새 백성이 된 사람들에게는 산상수훈이 헌법이요 헌장입니다. 산상수훈을 선포하신 후 예수님은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시는데 첫 번째 사역이 한 나병환자를 고치시는 것이었습니다.(마 8장) “예수님이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마 8:3) 말씀만으로도 병을 치유하실 수 있는 예수님이 손을 그에게 대셨다는 것은 그 나병환자의 가여운 일생에 대해서 연민의 정을 금하실 수 없는 긍휼의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본문에는 이런 나병환자 열 명을 한꺼번에 고치시는 예수님이 나옵니다. 이 열 사람들은 어쩌다가 길목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들을 먼저 찾아가서 만난 사람들입니다. 이때는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전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가시는 때 입니다. 장차 다가올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하시는 예수님의 발걸음은 몹시 무거우셨을 것입니다. 나병환자가 모여 있던 곳은 산 깊숙한 곳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었고,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그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인류 구원이라는 엄청난 사역을 위해서 십자가를 향해 가시는 중인데도 불구하고 평생을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을 찾아가 병든 몸을 고치시고 파괴된 삶을 고치시기 위해서 일부러 그곳에 들르신 것입니다.
나병환자를 찾아가신 예수님의 마음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마음과 같습니다. 나병환자 열 명을 한꺼번에 고치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한 집단을, 혹은 한 사회를, 혹은 한 나라를 집단적으로 고치신다는 상징적인 의미입니다. 사회가 어떤 한 사람이나 어떤 한 부분이 달라졌다고 해서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집단 치유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치유하심을 받은 열 명의 나병환자 중 주님께 감사한 사람은 사마리아인 한 명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을 보고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냥 가버린 아홉 사람에게 대한 섭섭함 보다 돌아와서 감사한 이 한 사람이 너무 고맙고 기쁘시어 그에게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음을 선언하시며 큰 축복을 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그 병자와 하나님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와서 감사한 것뿐이었는데 예수님은 모든 좋은 것을 그에게 내려 주셨습니다.
이번 홍해작전의 주제 성구가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대하 7:14) 입니다. 이 땅을 고치신다는 것은 이 사회에 깃들어져 있는 모든 병폐를 거둬내고 그릇된 문화를 종식시키고, 사회의 구조를 개혁시키어 하나님 나라에 걸맞는 공동체로 바꾸는 역사의 치유를 의미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 전체가 치유되어야 할 문제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양극화 문제, 집단적 이기주의, 둘로 나뉜 진영 논리 등 이런 일련의 일들이 우리의 기도 제목이 되어야 하고 고쳐져야 우리의 다음 세대들이 고쳐진 땅에 살게 됩니다.
우리 곁에 임재해 계시는 예수님을 날마다 느끼시며 예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고침의 은혜를 받아 개인을 고치시고, 교회를 고치시고, 나라를 고치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