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 36년을 지나 해방을 맞았고 그 후 5년이 지나 6.25전쟁이 일어났습니다.
1950년 7월 중순, 당시 저의 아버지는 고향의 면장 직에 있었고 저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습니다. 전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철부지인 저는 피난을 가지 않겠다는 아버지의 뜻을 알 바가 없었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면민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 먼저 피난을 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배신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소련의 스탈린, 북한의 김일성, 남한의 박헌영 3명이 전쟁 발발 약 2개월 전에 전쟁을 획책(劃策)하고 모든 무기는 소련이 지원한다는 원칙을 세우면서 한편은 2차 대전의 연합국인 미국과의 직접충돌은 피하려고 파병은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때 마침 남한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의 끈질긴 반미책동과 철수 데모로 배신감에 지친 미군은 참다못해 우리나라에서 철수하여 극동방어선을 일본해에까지 후퇴하게 되었으며 이를 “애치슨라인”이라고 이름하였습니다. 미군이 철수를 하게 되니 남한은 방어선이 공백 상태가 되어 북한으로서는 적화통일의 절호의 기회를 얻고 남침계획을 초특급으로 세우게 된 것입니다.
남한은 탱크 하나 없고 소형무기 하나 제대로 없는 무장해제 상태가 되어 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남침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서 유엔의 승인을 받은 대한민국을 지켜야 한다는 공의를 나타내시어 2일 후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게 하셨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전쟁 발발 보고를 받고 그 급박한 와중에도 2시간을 할애하여 골방에 들어가서 동방의 예루살렘 우리나라를 지켜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미국, 소련, 중국, 영국, 프랑스 5개국이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 되어 중요 사안을 결정할 때 그중 한 나라만 거부하면 부결될 수밖에 없는 유엔헌장이 한국을 돕는 의제 앞에 가로놓인 홍해가 되어있었습니다. 유엔이 한국 파병을 논의하려고 회의를 소집했는데 때마침 소련 대표 “말리크”라는 자가 불참을 하여 출석한 다른 4개국이 만장일치로 결의를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중국은“장개석” 총통이 이끄는 자유중국이 “모택동”의 공산당에 쫓기고 있었지만 유엔에서의 기능은 살아 있어 가능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어떤 사유로 소련 대표가 불참하게 되었는지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아마도 하나님의 손길이 자유대한민국을 붙들어 주시었고 또 복음전파의 아시아 전초기지인 이 나라를 지켜 주신 것으로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전쟁은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역전되었고 낙동강 최후 방어선 중에 경북 칠곡군 다부동 전투는 낙동강을 피로 물들인 격전지였습니다. 드디어 그 해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여세를 몰아 반격을 해서 평양과 함흥을 점령하고 청진까지 진격하는 승기를 잡았으나 1951년 1월 4일 중공군 30만 명이 대거 투입됨으로 1.4후퇴라는 이름하에 눈물로 서울을 다시 내어주는 수모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약 3년 1개월이 지난 1953년 7월 27일에 체결된 휴전협정이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있음이 헛되도다”(시 127:1)라는 말씀대로 안전보장이사회의 기적의 역사가 우리 믿음의 증거와 실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호국 보훈의 달을 지내며 73년 전의 참상을 돌아보고 또 한 번 살아계신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는 믿음의 백성들의 소원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믿고 되새겨 보며 어떤 역경에서라도 먼저 우리 모두는 전능자의 편에 서서 주님의 손길을 간구하는 성숙된 교우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정병무 은퇴장로 (6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