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양병원은 1909년 미국인 의료 선교사 포사이드가 길가에 쓰러져 있는 한센병 환자를 치료한 것이 계기가 되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세워진 한센병원입니다. 이 건물은 1925년 여수에 터를 마련하고, 1928년 ‘광주 나병원’에서 한센병자 600여 명이 옮겨와 지금의 ‘애양원’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1972년부터는 양로원으로 사용하다가 2000년부터 애양원 역사박물관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한센병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한국 한센병 의료 기관의 발전과 역사를 보여주는 각종 의료 기구와 사진자료 등이 풍부하게 전시되어 있고, 선교사들의 사역을 기념하는 역사관으로 개축되었습니다. 박물관을 둘러보다 보면 한센병의 추이와 하나님이 이 병원과 한센병 환자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애양원은 애양병원, 여수(구)애양원교회, 애양원 역사박물관,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관 등에 그 역사가 생생하게 남아있습니다.
애양원교회(예장 통합)의 제2대 담임목사인 손양원 목사님은 1939년 7월 14일 부임하여 목회를 시작했고 1939년 일제에 항거한 ‘원탁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습니다. 애양원에 가면 손 목사님의 유품 가운데 눈길을 끄는 봉투 하나가 있는데 바로 '감사헌금 봉투'입니다. 1948년 여수·순천사건의 와중에 순천사범학교를 다니던 손 목사님의 두 아들(동인, 동신)이 예수를 따른다는 이유로 공산당 청년(안재선)에게 총살로 순교를 당한 직후 장례식을 마치고 하나님 앞에 바쳤던 감사헌금 봉투입니다. 그 감사헌금 봉투 겉면에는 “두 아들의 순교를 감사하며 1만원. 손양원.”적혀 있습니다. 당시 손 목사님의 한 달 사례비는 80원이었습니다. 1만원은 목사님의 전 재산을 하나님께 바친 것입니다. 당시 손 목사님은 애양원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런 두 아들의 순교 소식을 접하고도 모든 예배를 정상으로 인도한 후 하나님 앞에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뜻이 계셔서 제 두 아들을 불러 가신 것으로 믿고 감사합니다. 하나님, 제 두 아들을 죽인 사람, 그의 생명을 보존해 주십시오. 제가 전도하겠습니다. 그가 그대로 지옥에 가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저에게 그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옵소서.”
그 후 두 아들의 장례식장에서 손 목사님의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쓴 10가지 내용은 신행일치의 삶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길임을 알지만 머리 위에 앉힌 자식에 대한 우상도 내려놓기 힘든 크리스쳔에게는 감탄스럽고 먹먹할 뿐입니다.
손양원 목사에게 성경말씀은 인생의 나침반이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 하나에 원망도 미움도 비통함도 모두 내려 놓았습니다. 안재선이 잡혀 사형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을 때 그 원수를 양아들로 삼는다는 아버지의 뜻을 딸(손동희)로부터 직접 듣고 있던 취조실은 안재선 학생의 참회의 눈물과 모두의 감동으로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손 목사님은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을 양자로 삼아 손재선이라는 새 이름을 지어 주었고, 후에 목회자로 키워내는 사랑의 열매를 맺습니다. 두 오빠를 죽인 원수에 대한 원망과 증오로 꽉 차 있었지만 오빠로 받아들여야 했던 손동희(손목사 딸)씨는 후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두 오빠와 아버지, 그리고 많은 순교자들, 그들은 죽은것 같지만 죽은 게 아니예요. 이들은 죽지 않은 한 알의 씨앗으로 남아있습니다.”
아름다운 남해바다를 여행하며 마지막으로 들른 애양원은 주님의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신 손양원 목사님의 사랑을 가시적으로 역사적으로 보여주는 감동의 시간이었습니다.
김애리 권사 (1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