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우리나라는 국권을 회복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로도 우리나라의 역사는 부끄럽고, 고통스럽고, 안타까운 일들의 연속이었습니다. 6.25 전쟁을 겪었고 극심한 경제난으로 외국의 원조에 의지해야 했으며, 교회들도 외국자본으로 학교를 세우고 연합기관을 운영하고 사람을 키우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빠른 시간 동안에 산업화와 민주화 그리고 문화적 선진화를 모두 이루어내는 민족적 저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현재 우리의 모습에 대하여 걱정스럽고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게 됩니다. 국가 정체성이 손상되고, 양극화가 극심해지고, 우리 사회의 윤리성이 심각하게 훼손되었습니다. 특히 이런 시대를 책임진 정치 지도자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심한 실망감과 배신감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선진국이란 경제수준이 높은 것이 아닌 선진화된 의식 수준을 가진 국민이 있는 나라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존경받는 국가의 모습을 갖춘 새로운 광복으로 나아가는 일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고 앞설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본문에 등장한 웃시야 왕은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으로 강성하여지는 복을 누렸지만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나병 환자가 되어 권력에서도 축출되어 별궁에 거하다가 생을 마감하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그의 생애가 주는 교훈을 생각하면서 나라를 사랑하는 신앙인의 한 사람으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떤 선한 영향력을 국가사회에 끼쳐야 하는 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1. 웃시야의 신앙
웃시야는 제12대 유다 왕으로 16세 때 즉위하여 무려 52년간을 재위하면서 나라의 큰 발전을 이루었고 많은 치적을 남긴 왕이었습니다. 그의 치적을 본문에서는 크게 세 가지로 소개합니다. 먼저는 웃시야 왕은 주변을 평정했습니다. 그는 주변 국가들의 잦은 침략과 약탈을 멈추게 하였고 주변 지역들을 평정하여 그들로 하여금 솔로몬 시대 이후 중단되었던 조공을 재개하게 했습니다. 동시에 그는 심각한 식량문제 해결을 시도했습니다. 농업을 장려하고 식량생산에 심혈을 기울여 식량 자급시대를 열었습니다.(9, 10절) 또한 무기 산업을 발전시켜 국가안보를 튼튼하게 했습니다.(14절)
그런데 중요한 것은 16세 어린 왕이 즉위해서 이렇게 영토를 확장하고 식량문제를 해결하고 무기 산업을 발전시키는 등의 엄청난 역사를 만들어낸 저력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라는 점입니다. 본문은 그 이유를 웃시야 왕이 ①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했고, ② 스가랴 선지자의 영적 지도를 잘 받아들였고, ③ 항상 하나님을 찾는 간절한 믿음으로 살았다고 말씀합니다.(4, 5절) 웃시야 왕이 그의 시대를 번성하는 견고한 시대로 만든 것은 다름 아닌 그의 성실한 신앙생활이 근본이었던 것입니다. 드러나는 모든 현상들은 그 바닥에 흐르는 정신에 있는 법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 최고의 문제는 영적 자산, 정신 자산의 빈곤입니다. 모든 것에 천박한 물질주의가 난무하고, 모든 분야에서 권력에 대한 욕망 논리가 작동합니다. 국민 전체가 지나치게 공격적이며 필요 이상으로 독하고 거친 표현을 일삼습니다. 공존과 일치의 가치가 사라지고 독점주의가 난무합니다. 이런 정신으로는 부흥하는 시대를 만들기가 어렵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할 일은 우리 사회의 정신적 지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종교적 패권을 추구하자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근본정신인 사랑, 정의, 평등, 성실 등의 가치가 시대정신으로 자리 잡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신앙정신에서 역사를 창조해 내는 능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2. 마음이 교만하여
권력이 절정에 이르고 하는 일마다 형통하여 안팎에서 웃시야를 향한 칭송이 자자할 때 그는 마음이 교만해지는 시험에 빠져들었습니다. 자신에게 금지되었던 마지막 한 가지인 종교적 영역까지도 장악하고 싶은 마음이 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정제도를 허락하실 때 모든 국가들처럼 왕에게 절대 권력을 주셨지만 한계는 매우 분명하게 정하셨습니다. 때문에 다윗도 솔로몬도 성전에서 제사 드리는 일은 제사장들에게 전권을 주어 행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웃시야는 이 일도 자신이 친히 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내가 하는 것이 더 좋겠다’라고 생각했고 절대 권력을 가진 자신이 종교 권력도 가질 권리가 있다고 여겼습니다.(16절) 성경은 그의 이런 행동을 ‘그가 교만하여 악을 행하고 범죄했다’고 말씀합니다.
웃시야는 말리는 제사장들을 뿌리치고 분향을 시도했고, 집요하게 반대하는 제사장들에게 분노할 때 그에게 나병이 생겼습니다. 52년을 왕으로 재위하면서 그의 치적은 다윗에 버금가는 빛나는 업적이었지만 마지막의 이 실수는 그 개인에게도 민족 역사에도 치명적 결함이 되었습니다. 교만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웃시야 왕의 삶 속에 스며든 교만이 무엇입니까?
1) 내가 했다는 생각입니다
성경은 그의 시대가 빛나는 역사가 된 것은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기 때문이며(5절),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을 얻었기 때문(15절)’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는 교만해지면서 ‘내가 이 모든 일을 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다 무익한 종일 뿐이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사역에 쓰임 받을 뿐입니다.
2) 자기 생각을 절대 기준으로 삼은 것입니다
웃시야는 제사장 80여 명이 성전에 제사하러 가는 행위를 간곡히 만류해도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자기 생각, 자기 아집을 끝까지 관철시키려고만 했습니다. 권력자들의 최대 약점은 자기 실수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정직과 겸손으로 반성과 회개가 있는 진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새로운 길을 열어 주십니다.
3) 자기 영광만 구합니다
자기 영광을 무리하게 추구하다가 다른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은 지도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웃시야 왕이 자기 권력과 영광을 과시하려 성전 제사까지 직접 감당하려 했다가 모든 사람들을 부끄럽고 분노하게 했습니다. 왕이 백성들에게 자랑과 기쁨을 준 것이 아니라 수치와 슬픔이 되었습니다. 국가 지도자는 국가의 존엄을 지키고 국민의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 존재합니다. 모든 공동체의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도자가 힘을 과시하고 사람을 억압하고 정의를 파괴할 때 하나님은 그를 버리십니다.
주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시고 세상에 오셔서 온전한 헌신과 희생의 삶을 사셨습니다. 끝없는 비난과 누명과 배신과 버리심을 당하셨으나 분노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가셨고 겸손히 기도하시며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하셨습니다. 풍요로운 내적 충만과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고 겸손함으로 새 역사를 만드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