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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농촌운동
 심훈의 소설 '상록수'는 1920-30년대 농촌계몽운동을 배경으로 한다. 이 소설의 여주인공 채영신은 가난한 동네 청석골에서 문맹을 퇴치하기 위해 애를 쓰다 그만 병을 얻어 짧은 생을 마감한다. 심훈은 이 채영신의 캐릭터를 기독교여성연합회가 파견한 운동가로, 활동 거점을 마을교회로 설정하였다. 이는 현실을 반영한 설정이었다. 채영신의 모델은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YWCA)가 파견한 농촌운동가 최용신이다.
 기독교가 농촌운동을 시작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사회주의의 확산이었다. 1924-1925년 사이 ?기독신보?에는 농촌의 경제적 상황이 계속 악화되면 사회주의가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될 것을 우려하는 기사가 종종 실렸다. 한국교계에서 가장 먼저 농촌운동을 시작한 것은 YMCA였는데 YMCA의 총무 신흥우와 학생부 간사 이대위는 사회주의의 반기독교 운동의 영향력을 염려하며 교회의 반성을 촉구했고 교회가 선도적으로 농촌운동에 앞장서야 사회주의를 저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YMCA는 1923년부터 농촌운동을 준비하다가 1925년 착수했으며 장로회와 감리회, 그리고 YWCA의 농촌운동은 1928년부터 본격화되었다.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는 1926년 미국 콜롬비아대학의 교수 브룬너(E. S. Brunner)를 초빙해 한국과 만주, 시베리아를 돌아보고 한국 농촌 상황에 대한 보고서를 만들게 했다. 이 보고서는 1928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국제선교대회에 제출되었다. 한국교회는 6명의 대표를 뽑아 예루살렘에 파견했다. 신흥우(YMCA), 정인과(장로회), 양주삼(감리회), 김활란(YWCA)의 한국인 4명과 노블(William A. Noble), 마펫(Samuel A. Moffett) 등 선교사 2명이 그 대표였다. 예루살렘 대회는 농촌운동에 대해 깊이 고민할 수 있는 토론의 장이었고 한국 대표들은 농촌과 농민이 중요한 선교의 대상임을 확인하였다.
 한국 대표들은 예루살렘 대회에 참가하기 전에 농축산업이 활성화되어 있는 덴마크를 시찰하고 한국 농촌의 이상적인 모델로 삼았다. '정말(덴마크를 의미)과 정말농민'(홍병선), '정말나라연구'(채핀 부인, 최봉직), '정말인의 경제부흥론'(김활란), '정말국민고등학교'(박인덕), '농민의 낙원인 정말'(양주삼)과 같은 책들이 연이어 출간되었다. 한국교회는 어떻게 덴마크가 농업강국이 될 수 있었는지를 알리며 한국 농촌이 나아가야 할 이정표를 제시한 것이다.
 한국교회의 농촌운동은 소작쟁의 같은 사회주의의 투쟁적 방법과 근본적으로 노선을 달리 했다. 온건하고 합법적으로 농촌을 계몽하며 농촌의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방식이었다. 먼저 교육기관과 협동조합의 설치가 이루어졌다. 문맹률을 낮추기 위한 야학, 농법을 개량해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농업전문학교, 농촌 지도자 양성을 위한 지도자 강습소 등이 설치되었다. 기독교인이 주축이 된 농촌단체가 속속 생겨났고 여러 개의 협동조합이 조직되었다. 장로회의 경우 1930년부터 신용조합을 시작했다. 조합의 운영은 총회가 직접 했고, 각 노회가 지부를 두고 회원을 모집했다.
 장로회의 농촌운동은 1935년 배민수 목사가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농촌부 총무를 맡으면서 더욱 활기를 띠었다. 배민수는 농촌운동과 신앙운동을 하나로 묶어 예수촌 운동을 전개했다. 농촌운동을 더욱 신앙적 차원으로 끌어올려 기독교 신앙에 입각한 이상적인 마을 만들기를 추진한 것이었다. 하지만 장로회 내부에서 농촌운동에 대한 비판이 나왔다. 직접적인 복음전도가 아닌 농촌운동은 교회가 할 일이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여기에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한국을 일본의 군수기지로 전환하면서 국내 민족운동을 뿌리 뽑기 위해 일으킨 농우회 사건(1938년)은 장로회의 농촌운동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유재기, 박학전 같이 배민수를 돕던 장로회의 농촌운동가들이 검거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고 배민수는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기독교 농촌운동은 급격하게 쇠퇴하고 말았다.
 기독교의 농촌운동은 계몽운동으로서 농민교육, 농사개량 등에 기여하였다. 국민의 절대다수가 농민인 한국의 현실에서 기독교 농촌운동은 한국사회 발전을 위한 매우 중요하고도 시기적절한 선교사업이었다. 일제의 산미증식계획과 시기가 겹치면서 일제의 수탈에 본의 아니게 악용된 점과 일제의 탄압과 훼방으로 실제 농민 생활의 획기적 향상으로 이어지지는 못한 점이 있으나 그 시기 한국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선교사역을 이루어 나간 것은 매우 중요한 역사로 평가된다. 교회는 언제나 그 시대의 역사적 선교 소명 앞에 서야 한다. 한국교회의 과거 농촌운동은 이에 대한 가장 적절한 교회의 응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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