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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과 기독교 (2) - 3·1운동의 전개
 엄혹했던 식민지 시기 대규모의 시위를 자유롭게 논의할 수 있었던 이들은 주로 해외에 체류 중인 한인들이었다. 대표적인 단체가 상해의 신한청년당과 미주지역의 대한인국민회였다. 이 두 단체는 모두 기독교인들이 주도하는 민족단체였다. 대한인국민회는 1918년 12월 파리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기로 하고 이승만 등 3인을 참석대표로 뽑았다. 그리고 뉴욕에서 열린 약소민족동맹회 총회에 참석하여 민족자결의 원칙에 따라 약소민족의 독립을 결의하였다. 신한청년당도 언더우드 선교사의 양아들인 김규식을 민족대표로 삼고 파리에 파견했다.
 이러한 해외의 소식이 알려지자 고무된 재일본 유학생들은 독립선언을 추진하기로 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유학생들은 2·8독립선언을 발표하기 전에 미리 송계백을 특사로 삼아 선언문 초안을 국내에 반입했다. 송계백과 신한청년단의 밀사들은 독립운동의 기회를 살피던 천도교 측 인사들을 만났다. 이를 계기로 천도교의 독립운동이 적극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했다. 1919년 1월 20일 천도교 간부들은 교주인 손병희에게 독립운동을 허락받고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의 원칙을 세웠다.
 기독교 쪽에서도 신한청년당의 선우혁이 이승훈 장로 등과 만나 독립운동을 논의한 후 평양을 둘러싼 서북지역의 기독교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추진하는 계획을 세웠다. YMCA, 세브란스 병원 등 선교기관의 인사들도 전문학교의 학생들과 독자적인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도처에서 독립운동이 기획되고 있었던 것이다.
 흔히 3.1운동을 ‘세류(細流)가 모여 대하(大河)를 이루었다’고 말한다. 이는 다양한 계층과 세력이 독자적으로 준비하던 독립운동이 하나의 큰 흐름으로 연대하였기 때문이다. 2월 7일 이승훈은 천도교 측의 연락을 받았다. 민족독립을 위해 힘을 합치자는 제안이었다. 이승훈이 이 제안을 받아들이자 종교계의 연합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독자적인 운동을 준비하던 학생들도 종교계가 추진 중인 기독교?천도교?불교 연합에 동참하기로 했다. 2월 24일 한용운과 백용성 등 불교계 인사들이 참여하자 종교계를 중심으로 한 민족대연합전선이 만들어졌다.
 3월 1일, 서울의 독립선언식이 두 곳에서 열렸다. 하나는 민족대표 33인이 모인 태화관이었고 다른 하나는 학생들이 가두시위를 준비하는 탑골공원이었다. 민족대표는 독립선언을 낭독하고 경찰에 전화를 걸어 자진체포되었고 학생들과 함께 공원에 모인 시민들은 만세시위에 돌입했다. 같은 날 평양, 진남포, 안주, 선천, 의주, 원산 등지에서도 만세시위가 일어나 빠르게 확산되었다. 초기의 시위 지역은 대체로 천도교나 기독교의 교세가 강한 지역이었지만 3월 중순에는 이와 상관없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1919년 6월 작성된 일제 헌병대 보고서에 따르면 경기도는 기독교?천도교?불교가 연합했고, 전라남도?경상남북도?평안남북도?함경북도는 기독교가 주도하고 천도교가 합류, 강원도?함경남도는 천도교가 주도하고 기독교가 합류하는 모양새로 시위가 진행되었다.
 기독교인들의 만세시위 참여는 신앙적인 결단에 따른 것이었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인 신석구 목사의 고민과 결단의 과정이 이를 잘 보여준다. 오화영 목사에게 민족대표 제안을 받은 신석구 목사는 두 가지를 고민했다. 첫째, 교역자가 정치운동에 참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가. 둘째, 교리상 용납하기 어려운 천도교와 협력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가. 신석구 목사는 매일 새벽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며 기도했다. 일주일째 그는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을 느꼈다. “4천 년 전하여 내려오던 강토를 네 대에 와서 잃어버린 것이 죄인데, 찾을 기회에 찾아보려고 힘쓰지 아니하면 더욱 죄가 아니냐?”
 신석구 목사에게 3.1운동 참여는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그는 어떤 사람이 아직 독립의 때가 아니라고 말하며 만류하자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지금 당장 독립을 거두려는 것이 아니라, 독립을 심으러 가네.” 신석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후손들이 독립의 열매를 거둘 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과 기억 속에 독립을 심는 것이었다.

“예수 말씀하시기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그냥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가 많이 맺힐 것이라’하셨으니, 만일 내가 국가 독립을 위해 죽으면 나의 친구들 수천 혹 수백의 마음 속에 민족 독립 정신을 심을 것이다. 설혹 친구들 마음에 못 심는다 할지라도 내 자식 3남매 마음에는 내 아버지가 독립을 위하여 죽었다는 기억을 끼쳐 주리니 이만 하여도 만족하다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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