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모든 사람을 향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민족, 국적, 성별, 직업, 계층 등을 초월하여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고 증거하는 것이 전도이며 선교입니다. 주님은 복음 전하는 자의 자세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3- 44).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선교정신이지만 현실에 서는 이를 실천하는 것이 너무나 어렵습니다.
요나 선지자는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곳의 백성들을 구원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게 됩니다. 요나는 결코 니느웨에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욥바 항구에서 배를 타고 니느웨의 정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들이라는 이유로 말씀 전하기를 거부하고 도피하는 요나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기어이 니느웨로 보내십니 다. 그리고 마침내 니느웨 사람들을 구원하십니 다. 오늘 말씀 가운데 우리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며, 모든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기를 소원합니 다.
1. 요나는 왜 다시스로 가는가?
선지자라면 당연히 하나님께 순종하므로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으로 가야하고 주신 말씀을 전해야 하는데 요나는 왜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하였습니까? 요나가 살던 때는 여로보암 왕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한 시기였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요나의 시대는 아모스, 호세아 선지자 등과 같은 시대였고 BC 800년을 전후한 시대였습니다.(왕하 14장) 이 시기의 영토 확장 정책은 필연적으로 북쪽의 강대국 앗수르의 강력한 반발을 초래했고, 이스라엘은 영토 확장의 꿈을 접어야할 만큼 두 국가 간의 감정이 극도로 악화되었던 때 였습니다. 앗수르의 우상숭배, 폭력적 사회, 전쟁포로들에 대한 정책은 역사상 가장 악명 높았습니다. 이런 상황을 하나님께서는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다"(2절)라고 하십니다. 바로 이런 때에 하나님은 요나에게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명령하신 것 입니다.
어찌 보면 니느웨를 싫어하는 요나의 생각도 이해되는 측면이 있습 니다. 니느웨는 우상숭배가 극심했고, 이스라엘을 정치·군사적으로 압박했고, 전쟁에서 포로 된 이스라엘 군인들의 눈을 뽑고 아킬레스근을 끊은 다음 짐승처럼 학대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혐오스러운 니느웨를 향해 요나에게 ‘일어나 가서 외치라’고 명령하십니다. 가끔은 우리도 요나처럼 난처한 상황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고 용서가 안 되는 사람이 내 앞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고 축복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참된 신앙인의 자세라 는 것입니다.
2. 왜 그는 풍랑을 만나야 하는가?
요나가 탄 배가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선장의 호통을 듣고 요나가 일어나 하나님께 풍랑을 멈추어 주시도록 기도했지만 풍랑은 더 거칠어졌 습니다. 선원들은 제비를 뽑아 이 원인이 요나 때문임을 알게 됩니다.(8- 10절)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을 외면한 선지자가 당하는 수모를 보게 됩니다. 그 한 사람 때문에 모든 사람이 측량 못할 어려움과 위기에 빠졌습 니다. 당대 최고의 영적 지도자인 선지자가 이방인 선장으로부터 ‘왜 잠만 자느냐? 일어나서 기도하라’는 호통을 들어야 했습니다. 요나가 자기 잘못을 사람들 앞에 고백하자 ‘어찌하여 그런 짓을 했느냐?’며 한심해 했습니다. 바닥을 모르는 추락이 그에게 이어졌습니다.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요나가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던 죄 때문입니다. 물론 니느웨 사람들이 죄가 많았습니다. 그들은 벌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들인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죄가 없었을까요? 아모스서에는 동시대 이스라엘의 죄악을 통탄하는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정의가 무너진 사회를 바라보면서 선지자는 ‘부디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하라’고 외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는 앗수르 사람들, 니느웨 사람들에 대해 저주의 마음 을 풀지 않습니다.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종일 수 있겠으며 선지자일 수 있겠습니까? 사람을 저주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문제가 풀리기 시작합니다. 이 모든 문제는 요나가 땅위의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사랑해야 할 사람들을 저주하고 혐오하면서부터 생긴 일입니 다.
3.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요나는 이 모든 고통이 자기의 죄 때문임을 인식하고 ‘나 때문이니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배에 있던 사람들은 냉큼 그를 바다에 던지지 않고 요나를 살리기 위해 끝까지 노력합니다.(13절) 그들은 이 한 사람을 살리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 모두가 저주 받아 멸망하기를 바라면서 배에 탔지만, 요나 때문에 죽을 고생을 하는 그들은 오히려 요나를 살리기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힘겨운 사투를 이어갑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의 노력은 실패했고 요나는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이 모든 절망과 고통의 상황을 종결지은 것은 한 사람의 회개였습니다. 요나 한 사람의 회개가 모든 사람의 구원으로 이어졌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먼저 나 한 사람의 회개를 기다리십니다. 왜 하나님은 요나의 회개를 이토록 집요하게 요구하셨습니까? 니느웨를 전도하는 일에 요나가 꼭 필요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돌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시는 하 나님께서 누구를 보내시고 누구를 사용하셔서라도 니느웨에 복음을 전할 수 있으셨지만, 집요하게 요나를 추적하시는 것은 먼저 요나가 회개하는 것을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낯을 등지고 외면해도 하나님은 그를 버리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배 밑창까지 따라가셔서 기어이 그를 회개시키시고 다시 세우시어 니느웨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수많은 사람 가운데 나 한 사람의 회개를 간절히 기다리시고 나를 추적하시고 따라 오고 계심을 믿으십니까? 내가 다시 믿음의 자리로 돌아가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회복되는 것이 하나님의 소 원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 139:7-10) 다윗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찾아오셔서 원래 내가 있어야 할 그 자리에서 맡기신 일들을 자랑스럽게 감당할 수 있도록 다스리시고 이끌어 주십니 다. 하나님은 내가 실패자로 인생 마치는 것을 결코 그냥 두시지 않으십니다. 내가 회개하고 회복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주변 모두가 복을 받게 하십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갑시다. 하나님께서 나의 회개를 기다리 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