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산된 하나의 교회와 선교지 분할 협정
- 선교지 분할협정에 따른 지역과 교파들 -
한국교회는 지역에 따라 교파의 분포에 차이를 보인다. 예를 들어 경상도와 전라도는 장로회가 압도적으로 많고, 강원도나 충청도에는 감리회가 많다. 인천과 강화도는 성공회 교회가 밀집해 있다. 지금은 많이 완화되었지만 20세기 후반에도 강원도에서 장로회가 이단 취급을, 경상도에서 감리회가 이단 취급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 왜 이렇게 교파별 지역 분포가 이리 극명하게 차이가 났던 것일까. 이는 선교초기부터 시도되었던 교계예양, 다른 말로 선교지 분할 협정 때문이었다.
1885년 미국 북장로회와 북감리회의 선교사가 한국에 도착한 이래 더 많은 교파의 선교사들이 한국을 찾아왔다. 1889년 성공회와 호주장로회, 1892년 미국 남장로회, 1895년 미국 남감리회와 엘라딩선교회(침례회), 1896년 플리머스 형제단, 1898년 캐나다 장로회, 1904년 안식교, 1907년 동양선교회(성결교회), 1908년 구세군 등 다양한 교파가 한국선교에 참여했다. 선교사들은 좁은 한반도에 여러 교파가 경쟁적으로 선교사업을 추진할 경우 생길 갈등과 중복 투자 등을 우려했고 이를 교파별로 선교지역을 나누어 맡는 것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이 선교지 분할 협정은 1892년 미북장로회와 미북감리회 사이에 처음 논의된 이래 새로운 교파들이 속속 한국에 들어오면서 여러 차례 갱신되었다. 하지만 실용적 태도가 배어있는 선교사들에게 인구가 많고 선교가 용이한 곳에서 활동하는 것은 민감한 문제였기 때문에 합의는 쉽지 않았다. 당연히 공식적인 교회연합기구가 이 문제를 조정해야 했다. 장로회와 감리회가 중심이 되어 1905년 설립한 ‘재한개신교선교부공의회’(Gen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가 이 일을 맡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선교지 분할 협정이 대체로 마무리되는 것은 1909년이다. 물론 이후로도 간헐적으로 추가 협의가 있었지만 큰 틀은 일제강점기 내내 유지되었다. 1910년을 기준으로 장로회와 감리회 선교지역의 대강을 보면 미국 북장로회가 경기도?평안도의 일부 지역과 경상북도, 미국 남장로회가 전라도와 제주도, 호주 장로회가 경상남도, 캐나다 장로회가 함경도, 미국 북감리회가 경기도?평안도의 일부 지역과 충청도, 미국 남감리회가 강원도를 맡았다. 그리고 서울이나 평양과 같이 인구가 많은 대도시는 공동 선교지역으로 남겨두었다.
그런데 선교사들은 처음에는 이 선교지 분할을 임시적인 조치로 생각했다. 협정을 조정하는 역할을 맡았던 선교부공의회는 원래 한국에 교파 구별이 없는 단일한 토착교회를 만들기 위해 조직된 기구였다. 선교사들은 한국에 필요한 것은 서양의 각 교파를 따르는 분열된 교회가 아니라 한국인들이 주체적으로 운영해나가는 일치된 교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905년 공의회를 조직하기 위해 모인 150여 명의 내한선교사들은 만장일치로 이를 결정하면서 이 교회의 이름을 “대한예수교회”로 정했다. 선교 현장의 입장은 그만큼 확고했다.
그러나 본국의 입장은 달랐다. 본국의 해외선교부들은 세계 각지의 선교활동과 결과를 두루 지켜보며 정책을 결정하는 입장이었다. 본국은 한국보다 앞서 토착교회 설립을 시도했던 일본, 중국, 인도 등의 나라에서 교회의 기독교 정체성이 모호해지는 상황이 종종 벌어졌음을 알고 있었고 같은 일이 한국에서 일어날 것을 우려했다. 결국 한국에 하나의 토착교회를 만들겠다는 선교사들의 꿈을 본국의 반대로 점차 사그라들어 1910년에는 완전히 무산되었다.
그 결과 임시적인 조치여야 했을 선교지 분할이 고착되었다. 원래라면 하나의 교회로 합쳐지면서 없어져야 할 교파들이 계속 활동하게 된 것이다. 각 지역에서 지방색과 교파색이 복합적으로 신앙에 영향을 미치는 현상이 30년 넘게 지속되었고 이는 지역별로 교회의 특성이 달라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강원도에서 장로회가 이단 취급을, 경상도에서 감리회가 이단 취급을 받았다는 우스운 이야기가 생긴 이유이다.